1964년 8월 2일 야간 국회 본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이 통과됐다. 법은 5일 공포됐으나 한 달여 뒤 언론계 대표단과 박정희 당시 대통령 면담 직후 청와대 발표 형식으로 시행이 보류됐다. 법안은 공화당이 단독으로 상정한, 다시 말해 박정희 지시로 당이 마련한 안이었다. 국회가 제정하고 정부가 공포한 법률을 보류시킨 것을 두고, 언론계는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역사적 의의’를 운운하지만, 그 법은 언제든 시행될 수 있다는 잠재적 위협으로, 법의 취지 즉 언론 통제의 효력을 발휘했다. 국회가 언론 규제 원칙에 합의, 입법 협상을 시작한 그 해 7월 18일부터 관제 ‘언론윤리위원회’ 소집 하루 전인 9월 9일 청와대의 법 시행 보류 발표까지 38일간의 정부-언론간 힘겨루기를 ‘언론파동’이라 부른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편협)가 ‘언론정화특별위원회’를 구성한 건 4ㆍ19혁명 직후인 60년 6월 9일이었다. 혼란기 난립한 신문 등 “신생매체의 폐해에 대응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언론사가 누리던 특혜가 사이비 언론을 꾄다고 본 위원회는 언론사 군 대여 차량 반납, 무임 철도승차권 반납 등을 결의했다. 지사ㆍ지국의 무급기자 일소 및 본사 발급 기자증 외 불인정 등도 결의됐다. 신문ㆍ통신사 지사 지국이 자체 발급한 기자증이 그렇게 많았고, 그렇게 된 기자들의 폐해가 컸다고 한다. 편협은 본사 기자들의 폐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정화법으로 정치판을 ‘정화’한 뒤 노린 게 그 지경의 언론계였다. 편협은 마찰을 피하기 위해 61년 9월 자진해서 신문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런저런 내용을 담은 회칙과 실천요강을 채택했다. 윤리위가 64년 3월까지 2년 반 동안 처리한 제소 사례는 27건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중한 징계라 할 경고는 6건에 불과했다. 언론 윤리와 별개로, 정권에 밉보여 기자가 투옥되는 등의 필화사건이 잇따랐다.
64년은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가 격화한 해였다.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됐고, 박 정권은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에 그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6월 23일 각의가 의결한 계엄법 개정안에는 언론 검열ㆍ규제 조항이 삽입됐고, 7일 뒤인 30일 발표된 정부ㆍ여당의 ‘파괴행위방지법’에도 언론 규제 내용이 포함됐다. 그 끝에 만들어진 게 (관제) 윤리위 설치 등을 골자로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이었다.
그 파동 와중이던 64년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가 만들어졌다. 법은 내내 보류 상태였다가 신군부의 언론기본법(80.12.26) 제정으로 폐기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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