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김지현(28ㆍ충북도청)은 지난 3월 22일, 군대에서 제대한 그날 곧바로 한국체육대학교 수영장부터 찾았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날 새도 없이 뭐가 그리 다급했던 걸까. 지난 1일 한국체대 수영장에서 만난 그는 “수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제대하고 풀에 뛰어드는 순간 내 두 번째 수영 인생이 시작된다는 벅찬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김지현은 ‘한때’ 한국 남자 배영 간판이었다. 주 종목인 배영 200m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전국체전 6연패를 달성했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0.1초 차이로 아깝게 동메달을 놓쳐 4위에 머물렀다.
잘 나가던 그의 수영 시계는 2014년 5월 잠시 멈췄다. 진천선수촌 불시 도핑테스트에서 상시 금지약물인 클렌부테롤 성분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열흘 전 서울의 한 이비인후과에서 처방 받은 감기약이 원인이었다. 클렌부테롤은 교감신경흥분제의 일종으로 목 감기에 걸렸을 때 복용하는 진해거담제에도 흔히 들어있는 성분이다. 자주 가던 병원이고 의사도 그가 도핑에 민감한 국가대표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의사는 청문회에 직접 출석해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는 김지현에게 2년 자격 정지 징계를 내렸다. 2015년 세계수영선수권 남자 자유형 100m 금메달리스트인 중국의 닝제타오(24)나 미국의 유명 여자 수영 스타 제시카 하디(30)도 클린부테롤 검출로 자국 도핑방지위원회로부터 1년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유독 김지현에게 최대치의 가혹한 징계가 내려진 셈. 항소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메달의 꿈도 사라졌다.
한 동안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운동은 안 하고 폭식하니 체중이 100kg까지 불었다. 가족들이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애써 태연한 척 할 때 가슴이 찢어졌다. 한 달 가까이 방황하던 그는 ‘그래. 2년, 군대에서 보낸다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육군사관학교 수영 조교에 지원했다. 최종합격을 앞두고 도핑 전력 때문에 곤란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낙담하고 있는데 아는 후배가 공군 수영장 관리병 모집 소식을 알려줬다. 2015년 초 공군에 입대지원서를 냈다.
얼마 후 박태환(28ㆍ인천시청)이 테스토스테론 성분이 든 네비도 주사를 맞아 도핑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져 체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김지현은 박태환과 동갑 친구다. 둘은 국가대표로 함께 활동하며 평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김지현은 그 때 박태환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 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태환이에게 차마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돌이켜보니 저는 친구들과 선후배, 선생님들의 위로에 큰 힘을 받았거든요.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가 정작 아무 위로도 못 해줬으니… 너무 미안하죠.”
아무도 관심 없었던 김지현과 달리 박태환을 구제하기 위해 대한수영연맹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국회까지 발 벗고 나섰다. 박태환은 2년 자격 정지가 유력하다는 예상을 깨고 2015년 3월,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6개월 깎인 1년 6개월 징계를 받았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태환의 리우 올림픽 출전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공교롭게 박태환 징계가 확정된 날 김지현은 머리를 짧게 깎고 입대했다.
김지현의 경우 논란의 여지 없는 의사의 명백한 과실이었다. 김지현이 박태환처럼 올림픽 금메달을 딴 유명 스타였다면 이런 중징계가 나왔겠느냐며 여론이 들끓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빗댄 ‘유명무죄 무명유죄’란 말이 회자 됐다. 김지현의 법률대리인이었던 정세형 변호사는 “스포츠에 신분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도핑에 관한 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며 쓴 소리를 했다. 정 변호사는 2015년 6월 KADA에 김지현 자격 정지 기간을 줄여달라는 진정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밖은 이 문제로 꽤 시끄러웠지만 정작 김지현은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은 거의 못 받았다고 한다.
“군대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었죠. 아시잖아요.(웃음) 제가 입대한 해 10월에 한국에서 세계군인체육대회(경북 문경)가 열렸거든요. 공군 5종이란 종목에 수영이 포함돼 있어서 수영 코치로 차출돼 장교 선수들을 가르쳤어요. 안 좋았던 일을 잊기 위해서인지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하게 되더라고요. 체계적인 훈련에 목 말라있던 장교들도 저를 엄청 반겼고요. 수영 종목에서 은메달을 따 보람이 컸죠. 선수 때는 몰랐던 지도자의 애환도 이해하게 됐고요. 하하.”
2015년 말 공군사관학교 수영장 관리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병사 신분이지만 대대장의 배려로 가끔 수영 훈련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늘 수영장 가까이 있어 행복했다. 청소 같은 허드렛일도 감사했다. 그는 전역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수영 훈련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였다.
제대하고 나니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수영 선수로는 ‘환갑’이다. 하지만 그는 군대 2년, 징계 받고 어영부영한 1년 합쳐 3년 가까이 쉬었으니 스물여섯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연일 물살을 가른다. 김지현은 “요즘처럼 힘들게 운동한 적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또 이렇게 훈련이 즐거운 적도 없었다”고 웃었다. 최일욱 서울시수영연맹 부회장은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 성실한 친구다. 20대 초반 선수도 헉헉대는 지옥 훈련을 거뜬히 소화한다. 곧 전성기 기량을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는 10월 충북 전국체전이 1차 시험 무대다. 얼마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계수영선수권에서 박태환을 비롯해 후배들이 좋은 활약을 펼친 걸 보며 자극도 받았다.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내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금빛 물살을 가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고된 훈련으로 지칠 때마다 김지현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내 수영 인생은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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