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새삼 무엇이뇨. 가장 솔직히 말해 심심해서 못 견디는 종자가 아니었던가. 원시시대 모닥불 가에서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김언수의 장편소설 ‘캐비닛’에 붙인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선언을 내내 되뇌는 밤이었다. 장르문학 출판사 북스피어가 4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한강유람선 안에서 개최한 1박 2일 행사 ‘장르문학 부흥회’는 위 선언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자리였다.
SF와 미스터리, 무협, 로맨스, 판타지 등 장르문학 좋아하는 독자, 편집자, 작가가 한데 어울려 여름밤을 보내는 이 행사는 2014년 시작했다. 첫해 참가자는 30명에 불과했으나 행사 이름처럼 해가 갈수록 부흥을 이뤄 이번에는 6일 만에 모집정원(150명)을 모두 채웠다. 강원도 폐교, 경기 파주 교하도서관 등 장소는 매년 바뀌고 행사 내용도 달리했는데, 올해는 박상준 서울 SF아카데미 대표, 김탁환·장강명 작가의 강연과 가수 요조의 공연이 밤새 한강유람선에서 펼쳐졌다. 서울시가 유람선을 빌려 주겠다고 먼저 제안하면서 시작된 행사다.
4일 오후 9시20분 서울 한강 여의나루역 선착장 안 아라 카페. 캔맥주와 커피, 각성음료수를 손에 들고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사이, ‘부흥회’의 취지에 맞춰 준비한 장르소설을 홀로 ‘열공’하는 참가자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하하하 유람선은 처음이다 보니 쉽지 않네요.” 참가자 명단을 체크하던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평소 재기발랄한 그답지 않게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서울시가 유람선을 밤새 운영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행사 시작 전 유람선 운전자가 퇴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출항 직후 출판사가 준비한 야식을 질펀하게 먹고 퀴즈쇼를 즐긴다는 계획과 달리 밤 10시45분 유람선이 멈춘 가운데 박상준 대표의 강연 ‘교양필수 SF 두 시간 완성’으로 행사가 본격 시작됐다.
자신의 단점을 “오래 들으면 피곤한 목소리”로 꼽은 박 대표는 “그래서 영상을 많이 준비했다”며 ‘카고’ ‘조니 익스프레스’ ‘천상의 피조물’ ‘이키가미’ 등 단편영화를 선보이며 장르문학의 특징과 트렌드를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박 대표가 언급한 영화와 소설을 깨알같이 받아 적다가 박 대표의 질문에 앞다퉈 손을 들고 답했다.
강연이 끝나고 자정이 되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이 갑판으로 올라가 야식을 먹는 동안 김탁환과 장강명 작가, 박 대표가 반짝이 웨이터 조끼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채 음료수를 나눠 줬다. 이강후(34)씨는 “작년 부흥회도 독서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참가했는데, 예상을 깬 장소, 진행이 재미있어 페이스북을 보고 모집 첫날 신청했다”고 말했다.
배가 40여분간 한강을 한 바퀴 돌아 선착장으로 돌아오자 가수 요조가 무대에 섰다. 서울 계동 독립서점 책방무사의 주인이기도 한 요조는 책방 운영 경험담을 이야기한 뒤 기타를 치며 노래 2곡을 들려줬다.
새벽 1시20분 ‘내 사람의 비밀’이란 주제로 강연을 시작한 김탁환은 “낮에 다른 데 가서는 절대 말 안 한다”며 작가로서 20여 년간 겪은 실패담 네 가지를 잇달아 소개했다. ‘불멸’과 ‘방각본 살인사건’ 등 화제작과 베스트셀러를 두루 낸 작가답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 외에도 “대표작 ‘나 황진이’ 쓸 때 실패담은 없냐?”는 참가자의 기습 질문에 또 다른 실패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카이스트에서 강의할 때 여학생 10명에게 ‘여자 작가가 썼다’고 말하고선 (출판되기 전) ‘나 황진이’ 원고 300매를 나눠 줬어요. 온통 빨간 줄이 쳐져 되돌아왔는데, ‘선생님이 쓰신 거죠?’라고 묻더라고요. 여자는 절대 이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고, 남자 작가가 쓴 여성 화자가 분명하다고요.”
새벽 3시 잠을 쫓기 위해 김홍민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장르문학 관련 퀴즈를 냈다. 마지막까지 퀴즈를 풀어 살아남은 3명은 북스피어의 책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다는 제안에 잠을 쫓던 참가자들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장강명 작가를 위한 깜짝 파티도 이어졌다.
새벽 3시30분 장 작가가 ‘사고실험으로서 장르문학 구분법’이란 제목의 강연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가위바위보에서 져 마지막 강연자가 된 그는 “꼭 들어야 하는 강연은 아니잖아요?”라며 호기를 부리면서도 눈꺼풀이 무거워진 참가자들의 집중력을 모으기 위해 책 6권을 경품으로 내걸었다. 강연과 질의응답이 끝나자 시곗바늘은 새벽 4시40분을 가리켰다. 언제든지 하선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새벽 4시50분 다크서클이 양 볼까지 내려온 김홍민 대표가 외쳤다. “내년에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서… 무인도 어떨까요?!”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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