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남편과 함께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스크린에서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많이 그립다”는 한 마디를 힘겹게 꺼내놓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깊은 사랑과 존경이 눈물로 차 올랐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모델인 독일 언론인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아내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80) 여사가 한국을 찾았다. 8일 입국해 9일 영화를 관람했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취재해 세상에 알린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 택시운전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0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브람슈테트 여사는 “영화를 보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벅차 올랐다”며 여운을 되새겼다.
“영화가 다큐멘터리만큼 사실적으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은 남편의 강한 의지를 잘 표현해 줬어요.”
힌츠페터는 자신이 경험한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영화화 제안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음 세대를 위한 역사 교육”이 되길 바랐다. “남편에게 광주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항상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역사였어요. 전 생애에 걸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죠.”
1980년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 소속 일본 특파원이었던 힌츠페터는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광주로 들어갔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광주 시민들이 폭도로 매도 당할 때, 그의 카메라만이 유일하게 진실을 증언했다.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45분짜리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대한민국’을 제작했다.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남편은 광주에서 촬영한 필름을 3일간 편집해 독일 방송사로 보냈어요. 방송사에서 편성을 내주지 않자, 일을 그만두겠다고까지 강하게 주장했죠. 그 덕분에 방송이 나갔고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 선고가 취소됐어요. 그 과정을 보면서 진실을 위해선 위험을 감수하고 투쟁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브람슈테트 여사는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 속 장면들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시민, 관 위에 태극기가 덮여 있는 모습 등을 떠올리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가지 않고 촬영을 할 수 있었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면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는 해야만 했다’고.”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 모르는 채 지냈다. 그러다 2002년 브람슈테트 여사가 일하고 있던 병원에 힌츠페터가 입원하면서 의사와 환자로 재회했다. 그날이 브람슈테트 여사의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65세 늦은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2003년부터 힌츠페터와 함께 여러 번 한국을 찾은 브람슈테트 여사는 “한국 사람들의 민주주의 열망을 높이 평가한다”며 “남편에게 감염됐기 때문에 광주와 한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힌츠페터는 1986년 서울 광화문에서 거리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 척추를 크게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1995년 58세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때 “광주 망월동 5ㆍ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다. 지난해 초 힌츠페터가 타계한 뒤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해 일부가 광주에 모셔졌다.
‘택시운전사’가 600만 관객을 돌파하고 5ㆍ18이 재조명되면서 힌츠페터에 대한 추모 분위기도 뜨겁다. 브람슈테트 여사는 “관객들께 감사하다는 말밖에 달리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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