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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채용] 블라인드 채용, 스펙을 가리니 ‘진주’가 보인다

입력
2017.08.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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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벌ㆍ가족ㆍ해외연수 등 대신

직무 경험과 실력만 평가해 채용

文 정부, 하반기 공공부문에 도입

평가기준 신뢰성ㆍ학력 역차별 논란

#2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오히려 낙하산 입사 부채질”

구직자들 사이서도 반응 갈려

합격자들 다양성은 현격히 증가

#3

창의성ㆍ열성 중요한 분야는 적합

일반행정 업무 확대는 비효율

블라인드 채용 100% 정답은 아냐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지난해 입사한 안병래 롯데정보통신 사원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지난해 입사한 안병래 롯데정보통신 사원

롯데정보통신 정보기술연구소의 2년차 직원 안병래(29)씨는 스스로를 블라인드(Blind) 채용 수혜자라고 소개했다. 서울의 한 중위권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블라인드 채용이 아니었다면 대기업 계열사 정규직 직원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 했다.

2012년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흠뻑 빠져 산 그는 방학이나 학기 중 틈 날 때마다 정부나 학교에서 지원하는 무료 강좌를 찾아 들었고, 4학년 때 한 IT회사에서 프로그래밍 관련 인턴으로 일했다. 다른 스펙을 쌓을 여력은 없었다. 강사들에게서 업계 소식과 현장 기술을 접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같은 전공의 친구, 선후배들은 취업을 위해 영어 점수 등 스펙 쌓는 데 시간을 보낼 때 전 프로그래밍만 팠습니다. 제가 좋아했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하지만 이런 재미와 열정을 이어 갈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서류 전형에서부터 고배를 마시기 일쑤. 어렵게 한 대형 금융회사의 IT분야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실무 관련 질문은 ‘자격증이 어떤 자격증이냐’에서 끝났다. ‘입사를 하면 어떤 자세로 일을 할 것이냐’는 질문으로 ‘회사 들어오면 사고 치지 않을까’를 판단하는 인상 평가가 잠시 이어진 뒤 짧은 면접은 막을 내렸다. 결과는 불합격. 프로그래밍 실력을 겨룰 기회가 있었던 곳은 게임회사들이었지만 이번엔 하루 종일 단순히 코딩만 하는 면접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너무 꿈 같은 얘기였는지도 몰라요.”

그러던 2015년 11월. 학력 영어점수 등 스펙을 아예 보지 않고 실무 경험과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롯데그룹의 ‘스펙(SPEC) 태클’ 채용 소식을 접했다. 이름, 이메일, 연락처와 그 동안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해 서류전형을 거친 후 실무 면접에서 안씨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제를 마주했다. ‘시스템이 장애 상황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세요.’ “현장에서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수준 있는 문제를 면접 과제로 다루는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딱 보는 순간 제 실력을 맘껏 뽐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넘쳤죠. 면접관이었던 연구소 선배들과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가지고 심도 있는 논의를 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결국 당당히 입사한 안씨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존재라고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우물 파듯 노력한 결과를 평가받을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공정 채용” “역차별” 논란과 우려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를 선언하고, 공공기관ㆍ지방공기업이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이를 시행키로 하면서 블라인드 채용이 채용 시장의 화두로 떠올랐다. 블라인드 채용이란 입사 지원서에 출신 학교, 학점, 지역, 가족 관계 등을 쓰지 않고 지원자 사진도 배제한 채 오직 업무 관련 경험과 실력으로 뽑는 것이다.

수저론이 팽배한 시대에 ‘공정한 채용’을 구현할 수단처럼 비치지만, 블라인드 채용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학력을 대체할 더 좋은 채용 기준이 있을까, 면접에서 인상이나 언변 좋은 사람이 유리한 것 아니냐, 블라인드 채용을 정부가 민간기업에까지 밀어붙이는 건 정당한가 등 논란과 불안은 구직자와 구인 기업 모두를 휩쓸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기존 스펙을 대체할 평가 도구의 신뢰성 여부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달 대ㆍ중소기업의 인사담당자 4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블라인드 채용 도입에 반대하는 응답자(79명ㆍ19.1%)들이 꼽는 이유도 이것이다. ‘인재 채용을 위한 기준, 판단 근거가 모호해서’(47.5%ㆍ이하 복수응답), ‘블라인드 채용에 맞춘 새로운 스펙이 등장할 것이라서’(45.0%), ‘외모나 임기응변과 같은 단편적인 면들로만 지원자를 판단할 우려가 있어서’(45.0%) 등 1~3번째로 많은 답변이 모두 채용 기준에 대한 불신이었다.

원래의 취지대로 직무 능력을 평가하려면 심층 면접 등 새로운 전형 방식이 개발되어야 하지만, 이런 준비 없이 부작용만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김왕준 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오히려 필기시험의 비중이 커질 가능성을 지적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스펙이라는 손쉬운 방식을 배제한다면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따지고 외부 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맡기는 등 전형에 시간과 비용이 엄청 들 수밖에 없다”며 “이런 비용을 줄이려다 보면 특히 예산이 빠듯한 공공기관은 직업기초능력평가, 직무검사 등 필기시험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부작용이 등장할 조짐은 위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난다. 블라인드 채용 도입 반대의 이유 중 하나가 ‘면접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게 될 것 같아서’(26.3%)였다.

한국국토정보공사의 블라인드 채용 시행 전후 달라진 입사지원서 모습
한국국토정보공사의 블라인드 채용 시행 전후 달라진 입사지원서 모습

구직자들 사이에서도 반응은 엇갈린다. 인크루트가 지난달 취업준비생 404명을 조사한 설문조사를 보면 블라인드 채용에 찬성하는 비율은 출신 대학에 따라 달랐다. 전문대(93%)와 지방 사립대(91%)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반면 서울과 해외 대학 출신의 찬성률은 70%로 이보다 낮았다. 취업준비생 김은혜(25ㆍ가명)씨는 “블라인드로 채용하면 서류 전형에서 어떤 기준으로 뽑겠다는 것인지 막막하다”며 “오히려 낙하산으로 들어가기가 더 쉬워지는 것 아니냐”고 불안한 심정을 토로했다. 출신 학교를 가린 채용을 통해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한 강성현(29ㆍ가명)씨는 “학벌을 안 본 때문인지 입사 동기들의 출신 학교가 다양하다”며 “솔직히 좋은 대학 들어가려고 재수하고 학점관리 하느라고 즐기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소위 역차별 논란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들였던 노력이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 무시당한다는 반발이다.

핵심 채용 기준인 학력마저 가려야 하느냐는 점은 실제로 상당한 논란거리다. 김왕준 교수는 좋은 스펙은 분명 쓰임새가 있다고 말했다. “우수한 대학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좋은 교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경험을 얻은 지원자에겐 분명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상돈 사람인 HR컨설팅센터장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대학 입시단계 즉 대학 정규과정ㆍ군복무ㆍ어학연수와 교환학생 등 7, 8년의 대학생활 이전의 학업성취 능력”이라며 “이런 과거의 능력을 토대로 현재 기업이 원하는 인재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인사담당자들의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인식 조사
취업준비생, 인사담당자들의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인식 조사

기업은 공정함이 아닌 인재를 원한다

블라인드 채용이 배경과 연줄이 작용하지 않는 공정한 채용이라는 인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이를 도입한 민간기업들의 방점은 금수저 타파나 정의사회 구현에 찍혀 있지 않다. 그보단 화려한 스펙에 가려 놓칠 수 있는 인재, 회사에서 더 잘 일할 사람을 뽑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난달 처음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한 구인구직 플랫폼 기업 사람인의 문경철 인사팀장은 기존의 채용 방식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고민한 결과였다고 강조했다. “현장에서 무분별한 스펙 쌓기 경쟁으로 인한 신입사원들의 고학력 스펙이 업무 성과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특히 요즘 모든 업계에서 공통적으로 입사 1년 내 퇴사율이 30% 가까이 될 정도로 이직률이 높아 인재를 어떻게 뽑아야 하느냐는 고민이 커졌죠.” 이상돈 센터장은 “학력만 토대로 사원을 뽑는다면 스티브 잡스나 토머스 에디슨 같은 인재는 설사 지원을 해도 뽑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주요 정보통신(IT) 기업들 사이에 블라인드 채용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학력과 실력 사이의 낮은 상관관계를 절감한 결과였다. 기존 그룹 공채가 바다에 그물망을 던져 한꺼번에 물고기 수백 마리를 건져 올리는 ‘그물망 형 채용’ 이라면 이제는 필요한 직무에 능력과 기술을 지닌 인재를 콕 찍어 뽑는 ‘작살 형 채용’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채용 시장에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채용 시장에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실제로 경험한 이들에게 블라인드 채용은 장점이 도드라진다. 장기 효과를 판단할 근거는 아직 부족하지만, 우선 합격자들의 배경이 다양해졌다. 지난해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국토정보공사의 경우, 올해 입사자 93명의 출신 대학은 총 59개로 2013년 36개 학교에서 73명의 신입사원을 배출한 것보다 다양성이 현격히 증가했다. 입사지원서에서 사진, 주소, 학력, 어학성적 등을 빼 스펙에 의한 진입 장벽을 낮추는 대신 기술자격증이나 직무 관련 지식과 경험 등으로 평가한 결과다. 2015년부터 일부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한 롯데그룹의 경우 유도선수 출신 프로그래머(롯데정보통신), 사회체육학을 전공한 광고기획 직무(대홍기획),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한 영화관 운영 직무(롯데시네마), 가정교육학 전공 홈쇼핑 PD(롯데홈쇼핑) 등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배경의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SK그룹의 블라인드 채용 프로그램인 '바이킹 챌린지' 지원자들이 자신의 면접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SK제공
SK그룹의 블라인드 채용 프로그램인 '바이킹 챌린지' 지원자들이 자신의 면접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SK제공

블라인드 채용 관문을 뚫은 신입사원들은 업무 적응이 빠르고 이직률도 낮다는 평가다. 지난해 블라인드 채용을 시행한 한국체육산업개발 문식 인사팀 차장은 “과거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회사와 업무에 대해 대략적인 인상만 갖고 입사해 업무 파악 기간인 2년 안에 50%가량이 퇴사했다. 그러나 블라인드 채용을 거친 입사자 중에선 지금까지 단 1명만 떠났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한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국토정보공사에 입사한 최환석(34)씨는 “측량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도시행정학 전공) 다른 직장을 다니다 늦게 국토정보공사에 입사했는데, 업무 관련 준비가 돼 있었기에 입사 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업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지원하는 ‘허수 지원자’가 크게 줄어 사회적 비용 절감 효과도 있었다. 문경철 사람인 인사팀장은 “1,000대 1 가까웠던 경쟁률이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자 절반으로 낮아졌다. 묻지마 지원이 크게 줄었든 것으로 보고 있다. 스펙은 없어졌지만 자기소개서에 직무 관련 지식과 경험을 묻는 질문들이 늘어나면서 훨씬 까다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롯데정보통신의 블라인드 채용에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박장식 매니저는 실무 면접 날 프로그래밍 과제를 제시하자 응시자 중 10% 이상이 그냥 일어서서 나갔다고 말했다. “실무 능력이 없는 응시자들은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될수록 묻지마 지원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사람인의 취업준비생 설문조사에서는 구직자들이 한 해 평균 30.2회 지원서를 내고, 100회 이상 내는 사람도 8.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 블라인드 채용 정답 아니다”

그러나 블라인드 채용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인사담당자들은 직무와 분야에 상관 없이 전 사원 블라인드 채용이 정답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기업보다 블라인드 채용을 일찍 채택한 SK, 롯데 등은 기존 대규모 공채의 틀을 유지한 가운데 일부 직무에 한해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한다. 롯데그룹 HR인사혁신팀 김진성 수석은 “인력 채용은 제한된 시간과 비용으로 인재를 확보하는 확률 게임”이라며 “블라인드 채용은 여러 채널로 다양한 인재를 뽑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IT, 마케팅 등 실무 능력을 볼 수 있는 직무, 창의성과 열정이 중요한 분야에선 적합할 수 있지만 일반행정 업무를 포함한 모든 직무를 이렇게 뽑는 것은 필요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기업으로선 과정 채용 방식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사람인의 경우 블라인드 채용 후 지원자가 절반으로 줄었지만, 자기소개서 하나를 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과거 평균 11분에서 현재 20분 이상으로 늘어나는 등 전형 업무는 줄지 않았다.

천명재 BSC컨설팅 수석컨설턴트는 정부의 블라인드 채용 드라이브에 조급해하지 말고 기업이 충분한 준비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블라인드 채용을 준비하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진행해 보면 충분한 고민과 이해 없이 등 떼밀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면밀한 직무 분석, 각 회사에 맞는 평가 도구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취지를 살릴 수 없어요. 정부 눈치를 보며 밀어붙였다간 좋은 제도가 사장되는 결과를 낳을 겁니다.”

튼튼하고 쓸모 많은 새 동아줄이 될 것인가, 부실한 관리로 썩은 동아줄이 될 것인가. 블라인드 채용의 성패는 정부의 뒷받침, 구인 기업의 철저한 준비, 구직자의 적극적 참여 여부에 달렸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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