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생존자 63명뿐… 평균 나이 93세
일제에 저항하다 희생된 유공자
15만명 추산 불구, 1만4651명만 인정
지난달 28일 일제강점기 부산의 대표적 항일 학생운동 ‘노다이(乃台) 사건’에 참가했던 김영찬(93) 애국지사가 별세했다. 노다이 사건은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 참가한 부산 중고생들이 일본인 학생에 편파적인 노다이 일본군 소령의 판정에 항의해 거리시위를 벌이고 그의 관사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후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에 가입한 김 지사는 1944년 일본군 탄약고 폭파, 일본 군용열차가 통과하는 구포다리 폭파 등 항일투쟁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김 지사 영면 소식에 광복회 등 독립운동가단체는 “이제 살아계시는 독립운동가는 63명뿐”이라고 탄식했다. 광복 72돌인 올해만 벌써 김 지사 포함 8명, 일제에 맞서 조국을 되찾고자 했던 독립운동의 산 증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생존 독립운동가의 평균 나이는 어느덧 93.1세에 달한다.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지만 독립운동가 부음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다. 김 지사 역시 일부 언론에 이름 석 자가 담긴 짤막한 부음기사가 나갔을 뿐, 그의 삶을 조명하거나 소개하는 보도나 기록물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한(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등에 따라 국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명예도 회복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독립유공자 예우 문제 역시 유공자 발굴부터 서훈 전달, 유공자 간 형평성 논란까지 풀고 가야 할 사안이 산적해 있다.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사실을 공식 인정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4,651명(13일 기준)으로, 국가보훈처는 이번 광복절에 새로 인정된 독립유공자 128명을 추가로 포상할 계획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을미의병이 일어난 1895년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전사 혹은 옥사, 장기간 수감 등의 고초를 겪은 이들이 15만명으로 추산되는 걸 감안하면 채 10%도 안 된다. 70년이 훌쩍 넘도록 대상자 90% 이상은 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희생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았어도 당사자나 유족에게 서훈을 전달하지 못한 경우가 5,469건에 달한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광복 50~6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지사들이 상당수라 대상자 3분의 1에 대해선 유족 찾기에 실패, 서훈을 전달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독립운동 당시 상황을 증언할 당사자나 유족을 더 떠나 보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유공자를 발굴하고 서훈 전달 작업을 하지 않으면 이들에 대한 예우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된다.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 기억하고 기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현충일 추념사가 빈말이 되지 않도록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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