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예능프로그램에서 패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게스트로 나온 걸그룹 멤버 두 명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한 명은 옷 자체가 재미있어서 입어보지 못한 옷에 도전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패션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이 예뻐 보이는 데 중점을 두고 옷을 고른다고 했다. 옷을 고르는 사람이 지닌 두 가지 대표적 태도를 상징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2000)에는 도둑질을 하다가 우연히 벼락 부자가 된 가족이 나온다. 그들은 부촌 주민이 됐지만 요란하고 화려한 졸부 패션과 인테리어를 벗지 못했다. 가족이 파티에 초대한, 부유하고 고상하게 자란 손님들은 몰래 비웃는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위대한 유산’(1998)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대도시에서 화가로 성공한 주인공이 파티에 찾아 온 삼촌의 ‘촌티’ 나는 시골 풍 정장을 몹시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옷을 선택해 입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실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고, 목적 지향적인 경우도 있고, 뭔가 잘못된 선택이 겹쳐 있을 수도 있다. 예민하게 분위기를 파악해 옷차림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렇다면 그것 대로 좋은 것이고, 아니면 그냥 마는 것이다.
요즘 패션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로 ‘고프코어(Gorpcore)’가 있다. 한동안 유행한 ‘놈코어(Normal+Coreㆍ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의 연장선상이다. ‘고프’는 그래놀라(Granolas), 오트(Oats), 건포도(Raisins), 땅콩(Peanuts)의 약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굿 올드 레이진 앤 피넛(Good Old Raisins and Peanutsㆍ잘 익은 건포도와 땅콩)의 줄임말이라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하이킹이나 사이클링을 할 때 들고 가는 견과류 바를 말한다.
놈코어가 아웃도어 의류를 도시에서 시크하게 입는 것이었다면, 고프코어는 아웃도어 의류를 그냥 ‘아웃도어처럼’ 입는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조금이라도 멋지게 보일 것이라고는 옷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직 편의성과 기능만 따지며 입는 것이다.
스포츠 샌들과 방수 재킷 같은 고프코어의 옷이 최근 몇 년 간 하이 패션으로 진입하고 있다. 얼마 전 발렌시아가의 남성복 패션쇼가 그런 사례였다. 커다란 후드와 색도 핏도 애매한 청바지, 1980년대 분위기의 헐렁한 스포츠 점퍼 등은 아무리 봐도 하이 패션 같은 스타일이 나지 않는다. 트렌드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트렌드를 따라 가다 보면 촌스러운 옷을 입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발렌시아가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차림은 농담으로 기능할 것이다. 샌들에 면 양말을 신는 것은 패션 피플에게는 농담일 수도 있지만, 더위에 발에 땀 나는 게 싫어서라는 실용적 목적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어쩌다가 저런 차림을 하게 되는 수도 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모습만 놓고는 그 배경에 대해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현대인의 삶에는 비즈니스 회의나 데이트 등 적절한 복장 규칙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언제나 멋대로 하는 건 불가능하고 좋은 일도 아니다. 규칙을 지켜야 하는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입는 포상이 주어져야 한다. 극단적 반사회적 패션만 아니라면 옷 세탁을 잘 해서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타인의 옷차림에 대해 오지랖을 부린다면, 그 정도까지가 좋다.
결국 각자의 삶이고 어떤 이유가 있는 선택이다. 옷을 입어서 기분이 좋든, 마음이 편하든,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든, 누구도 타인의 선택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을 보고 감탄이나 하면 된다. 그 밖에 필요한 말은 거의 없다. 이해도 안 되고 눈에 거슬린다 해도 타인 인생의 무게가 더 중대한 법이다. 다양한 이들이 함께 지내는 세상이란 이렇게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데서, 적어도 서로 내버려 두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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