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대결 시대 상생은 숙명”
2, 3차 협력사까지 지원 확대
현대ㆍ기아차 500억 기금 조성
삼성, 협력사 교육 年100억 투입
현금결제ㆍ직계약 거래도 확대
17일 오전 9시 경기 수원시 원천동 삼성전자상생협력아카데미 3층 강의실. 30, 40대 남녀 수십 명이 내부심사 분야에 대한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각자의 회사명과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건 교육생들은 전국에서 모인 1ㆍ2차 협력사 직원이다. 이날부터 3일간 진행될 이들의 교육비와 식대, 숙박 등은 모두 무료. 삼성전자는 협력사 직원 교육에만 연간 약 100억원을 투입한다.
2013년 6월 삼성전자가 국내 기업 중 최초로 설립한 상생협력아카데미는 연간 120여개 교육과정을 400여 차례 진행한다. 뿐만 아니라 구직자와 중소 협력사를 연결해주고, 신입사원 입문교육도 담당한다. 매년 이곳을 거쳐 가는 1ㆍ2차 협력사 직원은 1만4,000명이 넘는다. 협력사들은 교육에 대한 부담과 비용을 덜어 신규 채용 여력이 생기고 직원들은 자기계발을 통해 직업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휴대폰 케이스와 충전기 등을 생산하는 1차 협력사 이랜텍의 박한수(35) 대리는 “강의의 질이나 교육환경이 훨씬 뛰어나 경력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반도체 조립용 인쇄회로기판을 생산하는 1차 협력사 대덕전자도 상생의 덕을 톡톡히 봤다. 2000년대 중반 3,500억원 수준이었던 연간 매출은 삼성전자 상생경영이 본격화한 이후 5,000억원 규모로 커졌다. 2010년 630여명이던 직원 수는 최근 1,1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김경진 대덕전자 부장은 “삼성전자가 실시하는 협력사 직원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면 직무에 대한 전문성 높아져 당장 생산성이 높아질 뿐 아니라 근속 연수가 길어지는 등 회사의 안정적 성장은 물론 고용 유지 확대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조남채 상생협력아카데미 교육센터 그룹장(부장)은 “교육센터 임직원은 삼성전자 소속이어도 오로지 협력사를 위해 근무한다”며 “진정성 있는 교육으로 삼성전자의 노하우를 전파해 협력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전쟁터로 비유되는 글로벌 시장은 개별 기업의 경쟁을 넘어 협력사까지 포함한 ‘기업 네트워크’ 간 대결의 장이다. 혼자만 잘해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어떤 대기업이든 협력사와의 상생은 선택이 아닌 숙명이 됐다.
2000년대 초 불붙은 대기업들의 1차 협력사 챙기기가 올해 2ㆍ3차 협력사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특히 상생안에 일자리 지원까지 포함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협력사들의 지속적인 성장과 복지 확대, 이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기업 네트워크 경쟁력 향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협력사가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유지하도록 현금을 지원하는 대기업들도 늘고 있다. 현대ㆍ기아차는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을 덜어주기 위해 2ㆍ3차 협력사 전용 500억원 규모 상생협력기금 조성에 나서기로 했다. 두산과 두산인프라코어는 2ㆍ3차 협력사 및 영세 사내하도급 근로자에게 1인당 월 10만원씩, 연간 120만원의 임금을 보태줄 계획이다. 지원이 시작되면 최저임금 기준 약 5%의 임금 인상 효과가 발생한다. 두산인프라코어 권성순 동반성장팀장(부장)은 “정기적으로 협력사 직원들 임금을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산업계에서 처음“이라며 “일단 2ㆍ3차 협력사 직원들 임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지원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협력사의 자금 흐름 안정을 돕는 노력도 늘고 있다. 2005년 국내 대기업 중 처음 1차 협력사 물품대금 전액 현금결제를 도입한 삼성전자는 올해 6월 1차→2차 협력사 사이에도 30일 이내 현금 결제의 물꼬를 텄다. 1차 협력사들이 삼성전자가 조성한 5,000억원 규모의 ‘물대지원펀드’에서 무이자 대출을 받아 2차 협력사에 현금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2,000억원 상당의 물대펀드로 같은 지원에 나섰고, 현대ㆍ기아자동차는 2ㆍ3차 협력사 전용 자금 대출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KT 등도 2ㆍ3차 협력사 지원을 위해 각각 1,000억원 안팎의 펀드를 조성한다.
SK는 지난 10일 모든 정보기술(IT) 서비스 중소 협력사와의 직계약 원칙도 선언했다. 협력사간 재하도급 거래를 없애 2ㆍ3차 협력사들을 보듬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시도다.
상생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것은 분명하지만 직접적인 거래 관계가 없는 2ㆍ3차 협력사까지 아우르는 것은 기업에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현재는 대기업이 비용을 모두 대고 상생의 결과에 대해서 도의적 책임까지 떠안는 구조다. 공교롭게도 기업별 상생안이 같은 시점에 쏟아져 나온 것에 대해서도 우려가 적지 않다.
지난달 20일 정부는 ‘더불어 발전하는 대ㆍ중소기업 상생 협력이 포함’된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고, 1주일 뒤인 27ㆍ28일엔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주요 대기업들의 상생안 발표도 이 시기에 집중됐다.
만약 눈치보기 식 상생안이라면 경영실적이 악화할 경우 추진 동력이 달릴 수밖에 없다. 또 협력사 일자리 늘리기는 하도급거래공정화에관한법률이 금지한 경영간섭이 될 소지도 있어 조심스러운 사안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협력사와의 상생은 필요하지만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게 중요하고, 의도가 좋더라도 지나치게 서두르면 자발성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고 오히려 부작용을 부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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