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한낮의 무더위는 아직 한참 더 기승을 부릴 테고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어 과일의 단맛을 여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면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문득 소스라치듯 놀라고, 새벽이면 이불을 끌어 덮기 시작하는 여름의 끝. 가을을 준비하는 밤하늘에는 오래 전 시인이 가슴속에 하나 둘 새기던 별들의 향연이 이어집니다.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 자연을 책으로만 배웠던 서울내기 가슴 속에 이제야 시인의 별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고, 나이 오십에야 자연을 발견한 게 몹시도 아쉽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도시의 불빛 따라 헤매고 있을 아들에게 이 자연의 소리를 실어 보내주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염원을 담아 길었던 여름, 방학과 휴가를 맞아 숲속의 작은 책방으로 나들이 나온 부모님들께 ‘센스 오브 원더’를 권했습니다. 1962년 ‘침묵의 봄’을 통해 화학 살충제의 위험을 경고해 미국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레이첼 카슨. 자연을 경외했던 그녀가 조카의 아들인 로저와 집 주변의 숲과 바닷가를 거닐며 느낀 것들을 정리한 짧은 에세이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자연에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라.” 저자는 자연을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우리 감각을 총동원해서 자연과 사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요. 지식보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흥분, 기대, 공감, 동정, 존경, 사랑, 이런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부모라는 이름의 외로운 별들이여! 아이와 함께 다만 아름다움에 취하라. 아이와 함께 놀라워하고 느껴라.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의 의미, 신비, 아름다움에 다만 놀라워하라.”
전국 곳곳에서 힘들게 이 멀리 숲속의 작은 책방까지 찾아온 부모님들이 이곳에서 다만 아이들과 함께 새소리, 바람소리, 별의 목소리를 듣고 느끼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 데려간 한 권의 책 속에 이 모든 자연의 감성과 추억이 녹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책방에서 가장 만나기 힘든 친구들이 바로 청소년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유난히 청소년 자녀와 함께한 가족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구에서 찾아 온 중학생 친구 셋이 기억에 남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특히 소설을 좋아한다는 그들에게 소설의 재미를 알게 해준 책이 무엇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민경이는 ‘오만과 편견’을 이야기합니다.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떠나 할 말을 다하는 당당한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고 하네요. 다경이는 ‘파리대왕’을 꼽았습니다. 주인공이 자신과 같은 10대들이고, 많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하는 모습이 지금 자신들과 닮았다고 여겨졌답니다. 민주는 ‘데미안’을 읽으며 주인공 싱클레어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에 공감했다고 합니다. 답을 듣는 내내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풍성한 문학 경험을 하고 거침없이 감상을 풀어낼 줄 아는 청소년이라니요. 누가 이들을 단지 속없고 무서운 10대라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요.
책 읽기를 주저하는 또래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말해달라고 질문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민경이는 청소년들이 흔히 시간 때우려고 게임을 많이 하는데 책이야말로 시간 때우기에 가장 좋은 재미난 매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다경이는 문제에 부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해답을 찾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주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책을 통해 경험하게 되면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이타적 인간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센스 오브 원더
레이첼 카슨 지음ㆍ표정훈 옮김
에코리브르 발행ㆍ136쪽ㆍ1만2,000원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라헐 판 코에이 지음ㆍ박종대 옮김
사계절 발행ㆍ336쪽ㆍ1만3,000원
델문도
최상희 지음
사계절 발행ㆍ260쪽ㆍ1만원
스프링벅
배유안 지음
창비 발행ㆍ218쪽ㆍ9,500원
북스테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세 친구는 각기 청소년 소설 하나씩을 데려갔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민주가 데려간 책은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소재로 해 천대받던 존재가 미술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민경이가 고른 책은 ‘델문도’입니다. 스페인어로 ‘세상 어딘가’를 뜻하는 델문도. 각기 다른 세상 어딘가를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 소설집이지요. 다경이는 ‘스프링벅’을 골랐습니다. 입시 경쟁에 내몰려 꿈을 잃게 된 청소년들의 아픈 이야기입니다. 제인 오스틴과 헤르만 헤세를 읽는 중학생들이 이 책들을 통해 한 뼘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마다 격려의 글을 적어주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문학을 읽고 세계의 비밀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의 길을 따라, 별의 목소리를 따라, 사유하는 삶의 시간을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책이 있는 집, 그곳에서 단 하룻밤일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웁니다.
백창화 작가 숲속 작은 책방ㆍ북스테이네트워크(bookstay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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