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은 평등하다’는 인권 개념이 인류사에 등장한 건 불과 250여 년 전의 일이다. 미약했던 단어는 세계대전 같은 반인륜적 풍파 속에서도 살아남아 어느덧 자명한 도덕원칙처럼 자리잡았다. 20세기의 정치인들 중 인권이라는 이상을 한번이라도 연설에 담지 않은 자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언어와 현실, 정치와 실재의 간극은 여느 직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만 봐도 쉽게 느낄 수 있다. 한센병 환자들을 짐승처럼 대했던 전남 고흥군의 소록도 섬에서도 인권은 폐지 한 장의 값어치조차 되지 못했다.
이런 섬의 환자들을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했기에,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83)와 마가렛 피사렉(82)에게 ‘천사’라는 칭호는 아깝지 않다. 두 사람은 ‘저주받은 땅’에 처음으로 인권 개념을 뿌리내렸고, 40년에 걸쳐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라며 하염없이 자신을 낮추고 있다. 두 간호사의 남다른 노력과 겸손은 50여년이 지난 지금, 국가차원에서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센병 환자의 엄마 그리고 친구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간호학교 동창생이다. 1952년 각각 열 여덟, 열 일곱의 나이로 입학한 두 사람은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가까워졌다. 두 친구는 같은 꿈을 꾸었다. 병들고 힘든 자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겠다는 게 소망이었다.
졸업 후 두 사람은 한국의 한센병 환자 마을에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다던 그 나라였다. 1962년 마리안느가 먼저 전남 고흥의 소록도를 찾았다. 4년 후 마가렛도 뒤를 따랐다. 5년 정도만 돕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획했던 5년이 반평생으로 늘어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가 수용된 건 1916년부터다. 한센균 감염으로 발병하는 이 병은 예방도 치료도 가능하다. 하지만 의학지식이 부족했던 과거엔 지독한 전염병으로 여겨졌다. 감염되면 피부가 괴사돼 외모가 바뀌었기 때문에 한센명 환자에 대한 멸시도 심했다. 소록도에 이들을 수용한 건 치료를 빙자한 차별의 제도화였다. 환자들은 외부와 괴리된 것은 물론, 병의 유전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강제 단종수술을 당했다. 지난 2월 대법원은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강제 낙태ㆍ단종수술이 국가 책임이란 판결을 내렸다.
의사들 조차 접촉을 피하느라 꼬챙이로 환부를 툭툭 치던 시절, 20대의 앳된 간호사들은 맨 손으로 환자의 살을 만지고 함께 밥을 먹었다. 한 완치환자는 “가족조차 부끄러워하는 내 등을 두 분이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매일 새벽이면 병실마다 방문해 따뜻한 우유를 나눠주고 환자를 점검했다. 환자들의 생일이면 자신들이 사는 기숙사에 초대해 직접 구운 빵을 대접했다.
허름한 창고를 고쳐 미감아(한센병 환자의 자녀를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로 부르는 차별적 표현)들을 돌보는 영아원을 만든 것도 마리안느와 마가렛이었다. 정부의 지원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두 간호사는 오스트리아의 지인 및 봉사단체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이 보낸 후원금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결핵병동과 정신병동, 목욕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죽은 환자들의 옷을 수선해 입는 검소한 일생을 살았다. 청빈 순명 정결을 서약하되 수녀원 밖에 머무르는 ‘재속회’ 소속의 평신도임에도 그들이 ‘수녀’라 불린 건 이런 봉사정신 때문일 것이다.
두 간호사는 40년을 살아온 아름다운 섬을, 그곳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한센인들은 두 사람을 ‘큰 할매’와 ‘작은 할매’라 불렀다. 하지만 할매들은 2005년 11월 조용히 섬을 떠났다. 70세의 고령이 된 자신들이 되레 부담이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라고 써 있었다. 두 사람 덕에 연을 맺은 이공순(75) 전봉업(71)씨 부부는 두 수녀가 떠난 뒤 석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엄마 잃은 고통’에 울었다고 한다.
“제가 하는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고국으로 떠났지만 그들의 봉사정신은 또 다른 이의 가슴에 남아 싹을 틔웠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17년간 약사로 일했던 강경애(58)씨는 2002년부터 에티오피아와 네팔 등을 오가며 에이즈 및 나병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 강씨는 소록도에서 만난 두 간호사의 박애정신을 닮고자 해외 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소록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최연정(44)씨 역시 두 간호사처럼 살겠다는 뜻으로 2015년부터 볼리비아로 떠나 빈민구호에 헌신하고 있다. 소록도성당의 김연준(47) 주임신부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을 만들고 반 세기 전 한국처럼 도움이 필요한 나라를 지원하고 있다.
두 간호사의 헌신을 기리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부터 전남 고흥군은 (사)마리안마가렛, 국립소록도병원 및 개별 후원자등과 함께 두 사람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해왔다. 9월에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범국민 추천위원회'(가칭)가 출범할 예정이다.
하지만 두 간호사는 세간의 관심도, 노벨평화상 후보 추진도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4월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던 마리안느는 “제가 하는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환자들과) 지금까지 제일 좋은 친구로 살았었고 그저 부름에 따라 온 일은 알릴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현재 각각 대장암과 치매 투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최저수준의 국가연금만으로 이어가는 청빈한 노후다. 광주대교구와 소록도성당이 제안한 금전적 지원도 모두 사양했다. 이런 두 간호사가 상보다 더 바라는 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던 그들의 삶에 공감한 또 다른 이의 선행이 아닐까.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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