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에서 근대과학의 문을 연 학자들이 쓴 책에는 유독 제목에 ‘새롭다’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新機關)’과 ‘새로운 아틀란티스’, 요하네스 케플러의 ‘신천문학’, 갈릴레오의 ‘새로운 두 과학’ 등등. 이들은 서로 국적은 달랐지만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품었다는 게 이탈리아의 과학사학자 로시의 주장이다.
어쩌다 보니 최근 몇 달 사이에 나온 신간 세 권을 연달아 읽었는데, 거기서도 어떤 시대정신이 잡히는 듯했다. 읽은 순서대로 적는다. 퓰리처상을 세 번 수상한 토머스 프리드먼의 ‘늦어서 고마워’,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다.
이 21세기 작가들도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품는다. 그런데 셋 중 누구도 그 신세계를 그다지 밝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세계가 다가오는 속도가 충격적으로 빠르다고 토로하며, 사라지는 일자리 문제를 크게 걱정한다.
그나마 제일 낙관적인 책이 ‘늦어서 고마워’다. 책의 핵심 주제는 기술변화의 속도를 인간이 따라잡지 못해 위기가 벌어지고 있고, 그 위기가 점점 커진다는 것.
프리드먼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구글의 비밀 연구소인 ‘구글 X’에서 시험 중인 자율주행차를 타고,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을 인터뷰하고, 다음에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세네갈의 오지 마을 은디아마구엔으로 날아가 촌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최첨단 기술 현장과 세계 각지의 르포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니 007 영화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결론은 다소 맥이 풀리는데,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잘 적응하자’는 얘기다. 조금 길게 적으면 ‘우리의 문화와 사회구조를 기술변화에 맞게 혁신하고, 공동체 정신을 살려 사회통합을 이루자’는 것.
나의 반응은 ‘그게 말처럼 쉽나’였다. 자율운행차가 나오면 그에 맞춰 도로교통법을 개정하고 운수업계 종사자들에게 3D 프린터 기술을 가르치면 된다는 얘기로 들렸다.
‘아날로그의 반격’은 레코드판, 종이 노트, 필름 카메라, 보드게임 등 아날로그 제품들이 최근 몇 년 새 다시 인기를 얻는 현상을 포착했다. 책 소개를 읽고 책장을 열 때는 얼마간 흰눈이었다. 일종의 퇴행 현상, 허세 취향을 침소봉대한 이야기 아닌가 싶어서.
작가의 필력이 대단해서 빠르게 읽었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보다는 ‘실물이 중요한 이유(Real things and why they matter)’라는 영어 부제가 책의 메시지를 더 잘 설명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디지털은 차가워서 싫어하고 아날로그는 따뜻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들이 가상화하는 듯한 느낌’을 참지 못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중이다.
하지만 레코드판과 종이 노트가 다시 대세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자율운행차가 나와도 ‘드라이빙의 맛’을 잊지 못하고 직접 운전할 수 있는 차를 살 것이다. 그런 차를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게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그러지 않을 거다.
‘호모 데우스’는 세 책 중 가장 웅장했고, 가장 무서웠다. 하라리는 자율운행차를 도로교통이나 자동차산업의 새 등장 변수 정도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 없는 지능’이 출현해 세력을 넓혀가는 지구적 사건의 일부다.
지금껏 지구 역사에서 모든 지능은 의식이 있었고, 인간이든 동물이든 지적인 존재들은 저마다 욕망을 품고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사실 지능에 의식은 필요 없다. 아니 의식이 없는 편이 더 낫다. 의식 없는 지능은 곧 세계를 지배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 기꺼이 거기에 협조할 것이다. 자동차 운전대를 양보하는 식으로 말이다. 조금 더 지나면 국회의원과 판사의 권한을 인공지능에게 양보하려 들 것이다. 이 과정의 끝에는 인본주의라는 종교의 해체가 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세 가지 미래가 다 싫다. 혼잡한 지하철과 불친절한 택시, 그리고 교통사고를 자율운행차보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해야 하는 상품 꾸러미가 단 두 종류라면, 자율운행차가 없는 패키지를 택하고 싶다. 무엇보다 구글의 연구자들이 전 세계 택시와 버스기사, 대리운전 기사와 그 가족들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거야말로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할 일 아닌가.
타조처럼 굴고 싶지도 않고, 러다이트가 될 생각도 없는데, 나와 같은 인본주의교 신자들이 현명하게 단결할 길이 없을까. 기술혁신의 에너지원인 이윤을 얻는 구조를 함께 고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요즘 관심사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글로벌 공적 관리체제”라고 대답했더니 상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진지했는데. 세르게이 브린보다 이마누엘 칸트가 꿈꿨던 세상에서 살고 싶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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