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혁권(46)은 올 여름 극장가의 ‘숨은 강자’다. 보름 간격으로 내놓은 출연작 두 편이 다 잘됐다. ‘택시운전사’(2일 개봉)는 1,000만 흥행에 성공했고, ‘장산범’(17일 개봉)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한국 공포영화로선 4년 만에 100만 고지에 올랐다. 그는 자신을 낮춰 작품을 빛내 주는, 그래서 더 빛나는 배우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박혁권은 “감독이 원하는 지점에서 내 몫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겸손해했다.
박혁권의 연기에 담긴 특유의 안정감은 관객에게 신뢰를 준다. 공포 스릴러 장르인 ‘장산범’에서도 그는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홀린 아내와 딸을 지키는 모습으로 두려움에 떠는 관객들에게 위안을 줬다. 정작 스스로는 “평소엔 무서워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고 했다. “다른 장르에선 맡은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되지만 공포물에선 관객 반응을 미리 계산하는 공정이 추가돼요. 연기는 일종의 수단인 셈이죠. 영상 효과와 음향 효과가 가미됐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했어요. 친구를 놀래 주려고 책상 밑에 몰래 숨어 있는 것처럼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기능적일 수밖에 없는 역할에도 그는 생활감을 부여한다. 영화 속 가족에 닥친 공포가 현실처럼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실제 가족은 그렇게 살갑지 않아요. 좋은 얘기도 비꼬아서 하고요. 가족끼리는 친절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한 덕에 리얼하게 보이나 봅니다.”
‘택시운전사’에선 진실 보도를 위해 싸우는 광주 지역 신문 기자를 연기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라 선뜻 출연했다. 전남 완도에서 군 생활을 하며 광주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5ㆍ18 묘역에 참배한 적이 있어 특별히 관심이 갔다고 한다. “이 영화가 저에겐 사회 참여라는 의미도 있었어요. 가수라면 노래라도 부를 텐데 배우는 제약이 많아 그 동안 아쉬웠습니다.”
박혁권은 캐릭터 모델인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투쟁도 찾아봤다. 신군부의 만행을 기사로 썼으나 간부가 신문 인쇄를 막자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며 단체로 사직서를 낸 이들이다. 박혁권은 “실존 인물의 이야기인데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며 “사투리보다 감정에 집중해야 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면서 표정까지 어두워졌다.
박혁권은 자기 평가에 유난히 박하다.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봤는데 어떻게 내 연기에 만족하겠어요. 호날두의 볼을 본 축구선수가 자만할 수 있을까요. 맛있는 짬뽕 집을 아는데 일반 짬뽕이 성에 차겠냐고요.”
박혁권은 극중 인물이 ‘진짜’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적 사실성을 위해 세트까지 만드는데 배우가 가짜 연기를 하면 되겠냐”며 “대구탕에 들어간 대구가 가짜이면 그 음식은 쓰레기일 뿐”이라고 비유했다. 그래서 때로는 얼굴이 알려진 게 속상하기도 하단다. “‘진짜 의사 아냐?’ ‘진짜 깡패 아냐?’ 이런 평을 듣고 싶은데, 지금은 어떤 연기를 해도 배우가 박혁권이라는 걸 모두 아니까요.”
박혁권은 1993년 극단 산울림에서 연기를 시작해 뮤지컬과 연극을 두루 거쳐 2007년 드라마 ‘하얀거탑’으로 얼굴을 알렸다. 영화 ‘시실리 2km’ ‘음란서생’ ‘차우’ ‘의형제’ ‘스물’ 등 숱한 작품에 출연했고, 드라마 ‘펀치’의 매력적 악역 조강재와 ‘육룡이 나르샤’의 신스틸러 길태미 등 불멸의 캐릭터를 빚어냈다. 그러면서도 단편영화나 웹드라마 같은 작은 작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쌓인 출연작이 10여년 사이 90편 가까이 된다.
“이제 쉴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 중입니다. 그러다 인생작 제안이 들어오면 어떡하나 싶긴 하지만, 연기에 대한 생각을 점검할 때인 건 맞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좀 가지려고요. 물론 통장 잔고가 바닥나면 금세 돌아오겠지만요. 하하.”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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