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소년 에밋 틸(Emmett Louis Till)은 1941년 7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한 해 뒤 참전한 아버지는 전사했고, 지역 고교 네 번째 흑인 졸업생이자 유일한 장학생이던 어머니(Mamie Till)가 군무원으로 일하며 틸을 키웠다. 틸 모자는 흑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시카고 남부 중류층의 삶을 유지했다. 틸은 바쁜 어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거의 도맡아 하면서도 늘 밝고 유쾌했다고 한다.
55년 8월 20일, 14세의 그는 미시시피 주 머니(Money) 시에 살던 삼촌과 사촌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며 만류했지만, 틸은 잔뜩 들떠 있었다. 그에겐 첫 여행이었고, 당연히 남부의 참담한 인종 차별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는 24일, 사촌 등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브라이언트 식료품점에 들렀다. 확인된 건 그가 풍선 껌 한 통을 샀다는 사실뿐이고, 알려진 건 그가 계산대 일을 보던 식료품점 주인 로이(Roy Bryant)의 아내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손을 건드렸다는 거였다.
그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2시 30분 사촌 집에서 잠을 자던 중 로이와 그의 이복 동생 밀엄(J.W Milam)에게 끌려갔고, 사흘 뒤 인근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몸은 구타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고, 머리 등 곳곳에 총상이 있었다. 그의 신원은 아버지의 유품으로 어머니가 끼워준 반지로 확인됐다.
어머니 마미는 지역 교회에 안치된 아들의 관을 5일 동안 열어 두고, 참담하게 훼손된 얼굴을 시민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이 알아야 한다. 내겐 이 사실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 흑인이었을 약 10만 명의 시민이 틸의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로이와 밀엄은 체포돼 재판을 받았지만, 전원 백인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로 풀려났다. 린치에 가담한 백인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로자 파크스가 버스 흑백분리에 저항한 게 그 해 12월이었고, 이후 1년여 간 남부 버스보이콧 운동이 확산됐다. 9년 뒤인 64년 민권법이 제정됐다.
에밋 틸의 이야기는 다수의 책과 다큐멘터리 등으로 재현됐다. 2004년 미 법무부의 재수사 지시로 이듬해 미 연방수사국이 그의 시신을 발굴해 검시했지만, 사인과 DNA검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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