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음악의 대부’ ‘포크계의 음유시인’라 불리는 가수 조동진이 2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조동진의 소속사 푸른곰팡이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조동진이 28일 오전 3시 43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조동진은 최근 방광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해 왔다.
조동진의 동생인 가수 조동희는 “자택 욕실에서 쓰러진 것을 가족들이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모셨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며 “병세가 악화돼 수술을 받기 위해 오늘(28일) 입원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떠나니 너무나 황망하고 슬프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조동진은 푸른곰팡이의 동료 뮤지션과 함께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제목의 연합 공연을 다음달 16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 예정이었다. 좌석은 이미 매진됐다. 그러나 조동진은 끝내 이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다.
1966년 미8군 밴드에서 음악을 시작한 조동진은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에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수만과 서유석이 부른 ‘다시 부르는 노래’와 양희은의 ‘작은 배’를 작곡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9년 솔로 1집 앨범을 발표했다. ‘행복한 사람’과 ‘겨울비’가 수록된 이 앨범은 훗날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 발표한 2집 앨범 수록곡 ‘나뭇잎 사이로’와 1985년 3집 앨범에 실린 ‘제비꽃’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조동진은 시적 가사와 서정적 멜로디로 ‘한국의 밥 딜런’에 비유됐다. 후배 뮤지션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조동익 사단’을 이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인 동아기획을 이끌었고 1990년대엔 동생인 조동익ㆍ조동희 남매와 장필순, 이규호 등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꾸려서 활동했다. 현 소속사 푸른곰팡이는 하나음악의 후신이다.
조동진은 대중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주의’ 대중음악인으로 평가 받는다. 1994년 예술의 전당은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조동진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 그를 예우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계 모더니즘의 창시자”라며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대중음악의 세련미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김작가는 “선구적이면서도 특유의 감성을 녹여내 동시대와 호흡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유재하와 장필순으로 이어지며 한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형성했다”며 “1980~1990년대 대중음악계는 조동진을 빼고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동진은 1996년 5집 앨범 발표 이후 제주에서 칩거해 왔다. 2001년 ‘하나 옴니버스’와 2015년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했을 뿐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20년 만에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어둡고 가려진 곳에서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은, 내 오랜 노래 벗들에게 이 나직한 마음을 전해봅니다”라고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이 앨범은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이후 조동진은 1~5집 앨범 리마스터링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달 열리는 공연은 13년 만의 무대이자 ‘조동진 사단’이 1998년 이후 19년 만에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공연기획사 모스트핏의 김웅 대표는 “우선 장례를 잘 치른 뒤 가족 및 동료 뮤지션들과 공연 방향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2남(조범구, 조승구)이 있다. 발인은 30일 오전 7시.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9호실이고, 장지는 경기 벽제 승화원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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