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하이 패션은 힙합, 스케이트 보드 같은 스트리트 컬처(거리 문화)와 아웃도어 패션, 1980~1990년대 복고 풍의 과장된 점퍼, 스톤 워시 청바지 등이 뒤섞여 트렌드를 이끌어 가고 있다. 하위 청년 문화였던 것들이 시대 흐름에 따라 기성 고급 패션을 대체하고 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이를 가로지있는 트렌드 중 하나가 바로 낙서다.
이 트렌드는 낙서를 하기에 좋은 베이직한 단품과 함께 하는데,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스니커즈다. 베트멍은 리복의 ‘인스타펌프 퓨리’ 스니커즈에 낙서를 잔뜩 끄적여 놓은 스니커즈를 판매했다. 카니예 웨스트는 어린이들 용 ‘이지 부스트’ 에 자녀들이 이런저런 낙서를 하게 해서 만든 커스텀(재가공) 버전을 내놨다. 또 2016년 미국 뉴욕에 ‘파블로’ 팝업숍을 열 때 까만 매직펜으로 낙서를 잔뜩 해 놓은 빈티지한 분위기의 데님 재킷을 선보이기도 했다.
낙서를 옷에도 한다. 구찌가 스페인의 아티스트 코코 캐피탄과 함께 내놓은 컬렉션에서는 티셔츠, 가방, 스카프 등에 짤막한 단문을 특유의 삐뚤거리는 글씨체로 적어 놓았다.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이끄는 오프-화이트는 에어 조던 1 스니커즈에 커스텀 프린트를 한 버전을 내놓았다. 테니스 스타 로저 페더러가 신은 스니커즈 밑창엔 손글씨로 FEDERER라고 적었다.
최근 나온 마르지엘라의 ‘Leave a Message’ 스니커즈는 더 나갔다. 마르지엘라는 2000년대 초반에도 독일 군대에서 실내 훈련용을 쓴 가죽 스니커즈에 여러 낙서를 해 판매했었다. 낙서 문화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브랜드인데, 이번에는 합성 가죽으로 만든 하얀 스니커즈에 볼펜을 함께 묶은 ‘D.I.Y(Do It Yourselfㆍ직접 만든다)’ 세트를 내놓았다. 하고 싶은 낙서를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옷 위에 하는 낙서’ 트렌드는 완성도를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발상이 다르다. 1970년대의 펑크 문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펑크 문화는 D.I.Y 정신을 담아 찢어진 티셔츠나 가죽 재킷 위에 페인트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생긴 모습으로만 보자면 지금의 낙서 트렌드와 가장 비슷하고 방법에 있어 강력한 영향을 받긴 했다. 하지만 낙서가 있는 카니예 웨스트의 데님 재킷이나 구찌의 티셔츠에서 펑크 같은 격렬함과 세상에 저항하는 느낌을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당히 평화롭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결국 지금의 낙서는 유년기 학생이 책상, 사물함, 공책 또는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 무의미하게 끄적거리는 평범한 낙서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 산발적 단어와 끄적거림으로 채워져 있고, 혹시 뭔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생 로랑의 스니커즈에 적힌 “스모킹 포에버"나 구찌 가방 위의 “상식이 그다지 일반적이지는 않다” 같은 문장처럼 사춘기 학생이 밑줄을 그어 놓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중요한 점 중 하나는 낙서를 직접 하는 게 아니라, 낙서가 이미 돼 있는 패션 아이템을 구입하는 게 트렌드라는 것이다. 마르지엘라의 D.I.Y라는 예외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낙서 트렌드의 인기는 직접 낙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베트멍이나 구찌 아니면 다른 아티스트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제품화 된 낙서’라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낙서가 여러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건 확실하다. 신선함일 수도 있고,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 친근감일 수도 있고, 어렵게 구한 스니커즈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려 애쓰던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낙서 트렌드가 그다지 진취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패션이 줄 수 있는 것 중에는 이런 즐거움도 있는 법이다. 트렌드에 끌려다닐 이유는 없지만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티셔츠나 신발에 낙서 같은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다.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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