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넣는 병, 물병. 영국 신문 가디언은 “2017년의 지위 상징(Status Symbol)은 물병”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자동차, 골프채, 시계, 핸드백, 전자 기기 대신 물병이라니.
가디언의 분석은 이렇다. 수시로 물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패션이다. 부단한 자기 관리의 증거이므로. 예컨대 비욘세가 매일 물 4.5리터를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중은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더 동경하게 된다. 물병을 씻고 말리고 들고 다니는 건 불편하다. 환경을 지키려 페트병의 간편함을 포기하는 자기 희생. 물병은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은근한 자기 과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병은 자랑 거리가 됐다. 해시태그 ‘#waterbottle(s)’이 달린 인스타그램 사진은 무려 38만장이다. ‘#물병’으로 검색되는 사진은 2만6,000장. 한국에서도 물병이 ‘개념 패션’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오버 스펙 패션 물병의 시대
물병에 패션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건 미국 스웰 보틀(S’well Bottle)이다. 스테인레스 스틸 물병을 ‘핸드백처럼’ 만들고 팔아 대박을 냈다. 2010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1,200억원. “나는 물병 제조 회사가 아니라 패션 브랜드 대표다. 제일 먼저 고용한 직원은 패션 디자이너다. 창업 전에 패션에 돈을 꽤 쓰고 살았다. 멋진 핸드백에서 못생긴 물병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환경도 걱정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적중했다.” 창업자인 사라 커스의 얘기다.
악어 가죽 무늬부터 샴페인 골드 컬러까지, 스웰 보틀은 매년 수십 가지 디자인을 내놓고 대형 마트가 아닌 백화점에서 판다. 지난해 미국 뉴욕 패션위크에 초대될 정도로 고급 패션 아이템으로 인정받았다. 구두, 스카프처럼 T.P.O(시간ㆍ장소ㆍ상황)에 맞춰 매일 아침 물병을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
그저 ‘예뻐서’ 많이 팔린 건 아니다. 10~20시간 지속되는 보온ㆍ보냉 기능, 마실 때 흐르지 않되 얼음을 넣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주둥이, 찬물을 넣어도 물이 맺히지 않는 표면, 미끄러지지 않는 바닥. 그야말로 ‘오버 스펙’이다. 동네 뒷산을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오르는 아저씨의 오버 스펙은 조롱 거리였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박세진 패션칼럼니스트는 “지면의 냉기를 철저히 차단한다는 철광산 광부용 부츠, 에베레스트산 등반용 점퍼 같은 아이템을 일상에서 착용해 보니 뜻밖에 쾌적하고 즐거운 얘기 거리도 된다는 걸 알아챈 것”이라며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이 융합하는 추세”라고 했다.
스웰 보틀은 한국에 진출했다. 502㎖ 용량 물병이 4만8,000원. 800원짜리 편의점 생수 60개 가격이다. 1년 만에 1만개가 팔렸다. 수입사인 서브스탠스 관계자는 “운동, 패션, 여행, 환경에 관심 많은 20~40대 여성이 주로 사고, 여러 디자인을 소장하려 재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스웰 보틀은 대표 주자일 뿐. 콕시클(Corkcicle), 스탠리(Stanley), 클린 캔틴(Klean Kanteen) 등 프리미엄 패션 물병 시장이 커지고 있다. ‘디자인을 마신다’는 슬로건을 내건 미국 콕시클(Corkcicle)은 올 3월 국내 진출해 매달 8,000개를 팔았다.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어워드를 받은 하이엔드 패션 물병이다. 리퓨리는 디자인보다 기능에 집중한 한국 제품이다. 빗물, 수돗물, 약수, 계곡물을 정수하는 교체형 필터가 내장된 휴대용 정수기 겸 물병이다. 1만9000원짜리 필터로 물 300리터를 정수할 수 있다. 업체 관계자는 “페트병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 수돗물과 생수의 화학물질이 걱정되는 사람이 많이 산다”며 “조만간 미국 월마트 같은 유통 체인에 입점한다”고 했다.
자기 관리, 환경보호… ‘개념 패션’
그래서 물병이 ‘된장 남녀’의 사치품이 된 거냐고? 아무 물병이나 들고 다니면 안 되는 거냐고? 아니다. 사은품으로 받은 물병이든, 저렴한 다이소 물병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물병을 들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 그리고 자연스럽게 들고 다니는 것이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은 현대인의 미덕이자 의무다. ‘운동한다’는 ‘제대로 산다’의 동의어. 스포츠는 곧 패션이다. 그래서 나온 게 운동복과 일상복의 경계를 허문 ‘애슬레저(Athletic+Leisure, 운동+여가) 룩’. 스포츠 레깅스, 후드 셔츠, 야구 점퍼, 테니스 스커트, 조거 팬츠 같은 스포츠 아이템이 패션쇼 런웨이를 거쳐 거리로 나왔다. 나를, 내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건강한 멋.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은 “2010년 5,000억원대였던 국내 애슬레저 시장 규모가 2016년 1조5,000억원으로 커졌다”며 “2016년엔 2조원 규모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피트니스 클럽, 북한산 정상에나 어울렸던 물병이 폼나는 패션 소품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군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들고 다니는 물병에서 우리는 자신감과 의지, 취향을 읽는다. 더구나 몇만 원짜리 물병은 ‘나 자신에게 그 정도는 투자할 수 있다’는 여유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패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환경을 생각하자. 무심코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페트병과 일회용 커피 컵의 해악에 대한 무시무시한 통계. 한국에서 매년 생수병 제조에 들어가는 원유 27만배럴,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 배출량 6만933톤, 공기 정화에 필요한 나무 2,300만그루(2010년). 국내 페트병 재활용율 14%. 지구에서 팔리는 페트병 1분에 100만개.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매년 500만~1,300만톤. 종이 커피 컵이 완전히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 30년. 플라스틱 분해 시간은 수백~수천 년.
물병 냄새가 걱정된다고? 베이킹소다와 식초 같은 천연 세제로 자주 씻고 말리자. 세균이 문제라고? 페트병에선 환경호르몬이 나올지도 모르고, 정수기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한 어차피 세균의 온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 현지호 (성균관대 경영학과 4)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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