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페미니즘 서적이 붐을 이루지만, 한국 남성 소설가들은 여성을 근현대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남성 서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혜진 문화연구자는 4일 출간되는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 봄)에 발표한 글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문법과 정치적 임계’에서 “최근 적잖은 독자를 확보한 중견 남성 소설가들이 ‘장편 남성서사’라는 양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서사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베테랑’(2015), ‘검사외전’(2016), ‘불한당’(2017) 등 남성을 전면에 내세워 시장성을 확보한 남성서사가 영화계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소설의 경우 “그저 아저씨 독자를 되찾기 위해 독서시장이 전략적으로 생산해낸 남성 취향의 선 굵은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오 연구자의 주장이다. 이 글은 연세대 젠더연구소가 2015~2016년 개최한 남성성 연속 콜로키움의 연구 결과다.
오 연구자가 검토한 소설은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2014), 천명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 김훈의 ‘공터에서’(2017)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돼 수배자가 된 나복만의 삶을,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인천 뒷골목의 노회한 조폭 두목과 인생의 한방을 찾아 헤매는 사내들의 허술하고 어설픈 욕망을 그린다. ‘공터에서’는 1910년 태어난 마동수와 그의 차남 마차세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 속 굵직한 사건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오 연구자는 세 작품의 특징으로 “하층계급에서 태어나 비주류적 존재방식으로 일관해온 이 (주인공) 남성 인물들”의 등장을 꼽았다. 이 인물들은 “그 자체로 위기의 남성, 흔들리는 남성의 증거로 등장함으로써 장군, 재벌,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주류 남성서사와 구분된다”고 평가했다. 오 연구자에 따르면 세 작품은 주인공이 자신과 역사를 동일시하며 국가나 정부의 번영을 기원하는 영화 ‘국제시장’(2014)의 “우경화된 역사 서사”와도 다르고, 타락한 권력을 비판하는 선량한 가부장을 그린 영화 ‘변호인’(2013) 같은 “좌파 유토피아 서사”와도 결을 달리 한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역사의 피해자로 동정과 연민의 정서에 기대면서 이념적으로 보편적 민주주의에 호소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오 연구자는 “서사들이 구동 원리가 자기 피해자화를 수반한 약자의 정치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장편 남성서사는 ‘역사의 피해자’라는 운명의 형식을 불가피하면서도 특권적인 것으로 승인, 정당화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의 정치적 욕망 및 무의식을 반영한 역사적 장르”라는 것이다.
특히 발표하는 작품마다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인 김훈의 소설은 유아 성기를 묘사하는 등의 일부 구절뿐만 아니라 여성을 사유 능력 없는 존재로 형상화하고, 역사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작가의 인식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남성의 이념적 윤리적 무(無)성철은 밥벌이라는 ‘가장 정직한 노동’을 알리바이 삼아 정당화되지만, 그가 먹여 살려야 한다고 굳게 믿는 식솔들에게 서술자는 가혹하리 만치 어떤 사유와 철학의 여지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오 연구자는 “서로 전혀 다른 정치적 스탠스에 있다고 간주되는 ‘일베’(극우사이트 ‘일간베스트’의 약자)와 ‘국제시장’과 ‘공터에서’가 근현대사를 서사화하는데 동원하는 화소들과 그 성정치학의 문법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며 “이 서사들은 민주화 이후 성립한 진보적 상식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심문에 부치지만, 단 한 번도 가부장적 남성연대의 노래이기를 거부한 적 없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전의 세계에 머문다”고 평가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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