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의 ‘회음후(淮陰侯) 열전’은 능력에 비해 결단력이 부족한 한신(韓信)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동네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고, 빨래하는 아낙의 밥을 빌어먹을 정도였던 한신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항량과 항우 휘하로 들어갔다가 다시 한왕, 즉 유방(劉邦)에게 가서 우여곡절 끝에 “천하를 놓고 다투려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없습니다”(‘회음후열전’)라는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대장군에 임명된다. 한신도 고조의 신임에 화답하듯 조나라를 이기고 연나라를 치고, 불과 몇 년 만에 제나라마저 평정해 항우의 초나라만 남겨놓게 된다. 한신의 힘은 이미 한왕의 군사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아는 항우는 우이(盱眙) 출신의 무섭(武涉)을 보내 “한왕을 배신하고 초나라와 손잡아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되지 않으려 하십니까?”(‘회음후열전’)라는 말로 천하삼분을 제시했으나 한신은 “한왕은 나에게 대장군의 인수(印繡)를 주고 대군 수만 명을 주었소.(……) 무릇 남이 나를 깊이 믿는데 내가 그를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오”라는 말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한왕에 대한 무한 신뢰를 드러낸다.
그런데 한신이 천하의 대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한 인물은 또 있었다. 제나라 사람 괴통(蒯通)이었다. 괴통은 관상을 잘 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관상을 보느냐는 한신의 물음에 괴통은 “귀하게 되느냐 천하게 되느냐는 골법(骨法)에 달려 있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느냐는 얼굴 모양과 빛깔에 달려 있다”고 대답하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성공과 실패가 바로 결단력에 달려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덧붙여 그는 한신의 관상을 보고는 “제후로 봉해지는 데 지나지 않으며 게다가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장군의 등이 귀하기 이를 데 없다”는 해괴한 말을 던졌다. 한왕의 허장성세를 일깨우면서 한왕과 초왕의 운명이 한신에게 달려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한왕 편에 서지 말고 당당히 천하를 삼분하라는 과감한 권고였다. 그러나 한신은 “한왕은 나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소”라며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했다. 괴통은 다시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지게 마련”이라는 논리로 한신이 한왕과의 친밀한 교분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부질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군주를 떨게 할 만한 공적과 위세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확실히 입지를 굳히지 않으면 오히려 한왕에 의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신은 괴통을 돌려보내면서 자신이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뜸을 들였다. 며칠 뒤 괴통은 한신을 만나 “맹호라도 꾸물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준마라도 주춤거리면 노둔한 말의 느릿한 걸음만 못하다”는 비유를 들어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했다. 결국 한신은 한왕이 자신의 공을 인정하여 끝까지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괴통의 말을 무시했다. 괴통은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어 버렸다.
괴통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은 치워지는 게 세상이치가 아니던가. 한신은 한왕이 자신을 견제하며 옥죄어 온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친구 종리매의 목을 직접 가져다 바치는 무리수를 두었지만, 모반죄로 감옥에 갇혔다가 회음후로 강등되었다. 그러자 한신은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도 않고 늘 한왕을 원망했고, 심지어 자신을 마중 나와 신(臣)이라고 무릎을 꿇은 번쾌에게 “살아 생전에 번쾌 등과 같은 반열이 되었다니…”하고 비아냥거리는 오만함을 보였다. 한신은 거록군 태수였던 진희(陳狶)와 몰래 모반을 도모하다가 유방의 조강지처인 여후(呂后)와 자신을 추천해 준 소하에게 속아 붙잡혀 결국 삼족이 멸해지는 운명에 처해지고 만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죽은 한신은 괴통의 충고를 내치고 주군인 한왕을 믿는 순수함을 보이면서도 어정쩡한 모반계획을 펼쳤다. 고조도 한신의 뛰어난 능력을 이용하여 천하의 대권을 장악하고도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꾼 한신의 변심 가능성을 주시해 끊임없이 그의 동태를 살폈다. 한편 한신에게 치밀한 분석력과 상황판단으로 천하삼분지계를 세운 괴통은 자신을 직접 심문하다 흥분한 유방이 “삶아 죽이라”고 한 말에 차분하게 “삶겨 죽는 것은 억울하다”면서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개는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게 마련입니다”라는 말로 아부해 용서를 받고 풀려나게 된 것도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한신은 오만하면서도 순진했고 우유부단했다. 유방, 즉 한 고조는 그런 한신의 심리를 잘 알고 어수룩한 듯 치밀하게 대응했다. 한신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그토록 믿어준 소하에게 거꾸로 속은 것이나, 괴통의 말을 듣고도 결단력 있게 행동하지 못한 점도 따지고 보면 그의 그릇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절대 유리한 국면에 있으면서도 한신은 권력의 지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성하지 못했고, 모든 것을 잃었다.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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