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지난 지금도 강박증 시달려
혼자 목 매려 했던 적도 여러 번”
가해자 마주칠까 동창회도 못 가
성인 트라우마 상담자 살펴보니
‘청소년 폭력’ 원인이 10% 넘어
직장인 김모(32)씨는 밑창을 눈으로 확인하고, 신발 안을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신는다. 발바닥을 다치게 할 날카로운 무언가가 없다는 게 확인돼야만 한다. 십 수년째 반복되는 강박증. 몇 년째 병원을 다니지만, 강박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다.
17년 전, 중학교 2학년이었던 김씨는 한창 유행하던 운동화를 신고 갔다 봉변을 당했다. 하교하려고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는데 날카로운 게 발 밑을 찌르고 들어왔다. 갑작스런 고통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피로 물들기 시작한 발바닥과 신발. 대못이 밑창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왜 화나냐? 누가 좋은 운동화 신고 다니래”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퍽’ 소리와 함께 뒤통수가 울렸다.
김씨는 학교 폭력 피해자였다. “재수 없다“는 이유 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히던 같은 반 학생이 있었다. 발길질을 당하고 뺨을 수시로 맞아야 했던 시간은 1년 내내 ‘지옥이었다.’ 김씨는 “혼자 방에서 목을 매려고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털어놨다.
최근 SNS와 인터넷 등에 공개된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피해자의 모습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피에 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그 학생은 “사람을 보면 그 언니들(가해자)인가 싶다”는 호소를 반복하고 있다. 고작해야 14세밖에 안 된 여중생. 찢어진 뒷머리와 피투성이가 된 입 안 상처는 머지 않은 시기에 낫겠지만 폭행 전후에 생긴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은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줄 게 분명하다.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 자라야 할 어린 학생들에게 아물지 않는 영혼의 생채기를 남기는 게 바로 학교 폭력이다.
유명 회계법인 회계사로 근무 중인 박모(34)씨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고교 동창 모임을 나가지 못한다. 박씨는 “나오라는 연락을 받으면 고교 1학년 때 나를 괴롭힌 애가 나오는지부터 확인한다”고 했다. “다시 만나면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거 같아 지금도 무섭다”는 고백. 이런 박씨와 달리 그를 집요하게 때리고 괴롭혔던 그 학생은 꼬박꼬박 동창회에 참석한다고 한다.
학교 폭력 피해자들이 쉽게 트라우마를 씻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만큼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폭력에 멍들고 찢긴 몸의 상처는 곧 아물지만, ‘피폐해진 정신’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최근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이 트라우마 상담을 신청해 온 성인(20세 이상) 100명을 조사해본 결과, 그 중 ‘청소년기에 당한 학교 폭력’ 때문인 이들은 11명이고 특히 이중 30, 40대가 상당수였다. 수십년이 지나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 성숙 단계인 청소년기에 당하는 폭력은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을 불러일으키고,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 이유로 수십년 지나 만난 가해자에게 뒤늦게 폭력으로 되갚음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지방의 한 고교 동창 모임에서는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술잔을 나누다, 갑자기 "너 학교 다닐 때 나 많이 때렸지"라며 ‘학창 시절 가해자’에게 술병을 던져 난장판이 됐다. 반의 약한 친구에게 수시로 가했던 장난과 같았던 괴롭힘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 마음의 상처가 됐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학교, 부모, 친구들이 지켜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면 피해자들은 성인이 돼도 버림받은 어린 시절의 ‘나’로 계속 살 수밖에 없다”며 “주변에서 피해자들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걸 막아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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