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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붐’도 모자라 신태용의 ‘목’을 치란 말인가

입력
2017.09.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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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48) 축구대표팀 감독을 내보내고 거스 히딩크(71) 전 감독을 데려오라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댓글이 수천 개씩 달리고 청와대 청원까지 등장했다.

‘히딩크 바라기’들은 펀딩을 해서 히딩크 연봉을 마련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또 네덜란드로 가서 히딩크 의사를 직접 확인하지 않는 거냐고 축구협회나 언론을 꾸짖는다. ‘히딩크가 최근 터키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아서 실패한 것도 아는데 그래도 신태용 보단 낫다’고도 주장한다.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게 뭔지 가끔 쉽게 잊는다.

대표팀 사령탑으로 히딩크와 신태용 중 누가 더 낫느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명분과 원칙, 정도(正道)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신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지 두 달도 안 됐다. 열흘 훈련 하고 두 경기를 치러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다. 그를 내보낼 명분도 원칙도 없다. 또한 히딩크 측(히딩크의 공식 발언이 아직 없었으므로 ‘측’을 붙인다)은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 대표팀 사령탑이 공석이던 지난 6월에는 침묵하다가 본선 진출을 확정한 뒤 하루도 안 돼 언론에 터뜨렸다. 멀쩡한 감독을 내치고 눈에 뻔히 보이는 ‘꼼수’를 쓰는 인물을 대표팀 사령탑 자리에 앉히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지난 6일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를 지휘하고 있는 신태용 감독. 타슈켄트=연합뉴스
지난 6일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를 지휘하고 있는 신태용 감독. 타슈켄트=연합뉴스

지인을 통해 이런 말도 들었다.

“(감독을 바꾸는 게) 법을 어기는 행위도 아니잖아요.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 내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월드컵을 보며 국민들이 좀 즐거워하고 싶다는 데 명분과 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 건가요.”

씁쓸하고 서글픈 말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지휘봉을 잡았던 차범근(64) 감독은 조별리그 2경기를 치르고 경질됐다. 한국이 1차전에서 멕시코에 1-3,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하자 팬들의 원성이 빗발쳤고 축구협회는 대회 도중 사령탑 경질이라는 충격 요법을 썼다. 프랑스 현지에서 기술위원회가 열렸는데 유일하게 반대한 기술위원은 “한국 축구의 꽃인 차 선배를 이렇게 내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최순호(55) 포항 감독뿐이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조광래(63) 대표팀 감독이 경질됐다. 기술위도 거치지 않은 축구협회 수뇌부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차 전 감독은 당시 칼럼을 통해 자신이 프랑스에서 물러났을 때를 회고하며 이런 일이 또 반복되는 현실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모두 한국 축구에서 부끄럽고 가슴 아픈 장면들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명분과 원칙은 중요하다. ‘공정성이 생명’인 스포츠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는 과거 ‘차붐’에게 했던 것처럼 명분과 원칙을 무시한 채 신태용의 ‘목’을 치라고 축구협회에 압력을 넣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차범근(왼쪽)과 2011년 12월까지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광래. 명분과 원칙을 어겼던 둘의 경질은 한국 축구의 부끄러운 역사 중 하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차범근(왼쪽)과 2011년 12월까지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광래. 명분과 원칙을 어겼던 둘의 경질은 한국 축구의 부끄러운 역사 중 하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이란 책 앞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여론의 법정은 법률적인 법정과 달리 식탁에서, 직장 동료와 대화에서, 인터넷상 논쟁에 이르기까지 ‘배심원’의 구성, 영향력의 크기가 천차만별이다. 여론 법정은 증거원칙도 없고 소송 절차에 관한 규정도 없다. 법률의 법정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만 여론 법정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지배한다.”

신 감독이 법률적인 법정(월드컵 본선)에 서기도 전에 여론의 법정에서 좌초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신 감독이 ‘히딩크를 생각하며’ 힘을 내길 바란다. 지금은 ‘난세를 구할 영웅’으로 추앙 받는 히딩크지만 한 때는 그도 ‘오대영 감독’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고 매일 여론 재판을 받았던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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