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늦여름 미국 캘리포니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란계 미국인 청년 피에르 오미디아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온라인에서 경매로 물건을 사고팔게 하면 어떨까’.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좋아해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가 된 그는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를 확장해 경매 기능을 덧붙인 뒤 직접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름은 ‘옥션 웹’이라고 붙였다. 처음 올린 물건은 고장 난 레이저포인터였다. 놀랍게도 14.83달러에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금세 나타났다. 오미디아가 “고장 난 걸 알고도 사려는 거냐”고 묻자 구매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고장 난 레이저포인터가 필요합니다.” 100달러가 넘는 새 레이저포인터를 사는 게 부담스러워 고장 난 레이저포인터를 고쳐 쓰려 했던 것이다. 오미디아는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기업이 아닌 개인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해주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전 세계 1억7,000만명이 이용하는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베이(eBay)는 이처럼 컴퓨터광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베이는 낯선 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물건 값으로 현금을 봉투에 담아 보냈을 정도로 온라인 거래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던 때 그는 이베이 사용자들이 어떻게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을까. 오미디아의 설명은 다소 뜻밖이다. “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또 일반적으로 선량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 체계를 지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오미디아의 이 같은 생각은 훗날 이베이 경영만큼이나 적극적인 사회공헌ㆍ자선활동의 바탕이 된다.
취미로 시작한 이베이, 대박을 터트리다
피에르 오미디아(50)는 이란에서 프랑스로 건너 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언어학자,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오미디아는 아버지가 미국 볼티모어의 대학병원에 직장을 얻게 되면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오미디아는 컴퓨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체육 수업을 빼먹고 고교 수업용 PC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를 발견한 교장은 오미디아에게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묘안을 떠올렸다. 소년을 혼내는 대신 시급 6달러에 학교 도서관 목록 카드 작성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터프츠대에 진학해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다.
컴퓨터 분야에서 오미디아는 다른 이들에 비해 한 발 더 앞서 나갔다. 애플 자회사인 클라리스에서 잠시 근무한 뒤 1991년 세 명의 친구와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 ‘잉크 디벨럽먼트’는 펜 컴퓨팅(컴퓨터의 문자 입력을 포함한 모든 조작을 펜으로 하는 방식)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타트업이었다. 당시 오미디아는 재미 삼아 회사 홈페이지에 기초적인 형태의 인터넷 쇼핑몰인 ‘이숍(eShop)’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프로그램 개발 사업은 실패했고 이숍은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려 최소한의 성공을 거뒀다.
첫 사업 실패에 낙담한 오미디아는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갔다. 1994년 소프트웨어 업체인 제너럴 매직에 취직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한편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려갔다. 이베이의 전신인 옥션 웹을 만든 것도 이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혼자서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오미디아는 처음엔 옥션 웹을 취미활동으로 여겼다. 하지만 컴퓨터광의 소박한 취미활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홈페이지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접속자들이 몰려들어 회사를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불과 5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창업 3년 만에 억만장자로
이베이를 만든 오미디아와 아마존을 설립한 제프 베조스는 여러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된다. 둘 다 어린 시절 컴퓨터광이었고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전문가였으며 1995년 인터넷 상거래 사업을 시작해 초일류 기업을 만들어냈다.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는 언론사에 거액을 투자한 점도 닮았다. 하지만 경영인으로서 오미디아는 베조스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모든 것을 파는 인터넷 가게’를 목표로 치밀하게 준비해 사업을 시작한 베조스와 달리 오미디아는 취미로 시작한 일이 급팽창하며 엉겁결에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최저가 정책으로 오랜 기간 적자를 본 아마존과 달리 이베이는 처음부터 흑자를 냈다. 판매자에게 거래 성사 수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익이 생겼기 때문이다. 거래가 급속도로 늘고 수수료 수입이 회사 월급을 넘어서자 오미디아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레이저포인터 판매로 시작한 이베이의 경매 건 수는 설립 이듬해인 1996년 총 25만 건으로 늘었고 1997년 1월에만 200만건을 기록할 만큼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베이의 성장은 오미디아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업 초기 1952년형 롤스 로이스가 경매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오미디아는 ‘굉장한데! 하지만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차를 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이베이에서는 미국에서만 4분에 1대씩 차가 팔리고 있다.
오미디아는 부지불식간에 인터넷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혈관 가운데 하나를 건드렸다.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그는 “처음에는 단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사이트를 물건 사고파는 공간으로만 이용할 줄 알았는데 그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옥션 웹이라는 회사 이름은 1997년 이베이로 바꿨다. 오미디아는 당초 평소 자주 가던 장소인 네바다의 ‘에코 베이(Echo Bay)’로 이름 지으려 했지만 이 이름을 쓰고 있는 회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cho’를 뺀 ‘eBay’로 고쳤다. 이듬해 9월 이베이는 기업공개(IPO)를 했다. 회사의 목표 주가는 18달러. 하지만 상장 첫 날 이베이 주가는 53.5달러로 마감했다. 평범한 회사원, 실패한 스타트업 사업가 오미디아는 31세에 억만장자가 됐다. 취미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결과였다.
기업 경영인으로서 오미디아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찌감치 회사 경영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창업 20년이 된 2015년에는 회장(이사회 의장) 자리에서도 물러나 이제는 이베이 경영과 무관한 상태다. 오미디아는 창업 1년 만에 스탠퍼드대 출신 제프리 스콜을 사장으로 임명한 뒤 1998년에는 디즈니 부회장을 역임한 멕 휘트먼을 최고경영자(CEO)와 사장 자리에 앉혔다. 휘트먼은 유럽판 이베이인 ‘아이바자(iBazar)’와 온라인 결제시스템 페이팔, 인터넷 전화업체 스카이프를 인수(페이팔은 2015년 자회사에서 독립 회사로 분리, 스카이프는 2009년 지분 30%만 남기고 매각)하는 등 10년간 회사를 이끌며 이베이가 세계 최고 전자상거래 사이트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부는 제2의 사업”
흔히 오미디아를 수식하는 표현은 ‘이베이의 창업자’나 ‘세계 ○○번째 재벌’ 정도일 것이다. 그는 13일 기준 세계에서 166번째, 미국에선 61번째로 부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알려면 기업 경영이나 재산의 규모가 아닌 사회공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오미디아는 보기 드문 혁신적 사회공헌 사업가이기 때문이다. 오미디아의 재산은 97억달러(약 10조9,460억원)에 이르지만 2001년 그는 재산의 99%를 세 자녀에게 상속하는 대신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베이가 상장되기도 전에 비영리기관 ‘이베이재단’을 만들어 사회공헌 활동을 시작했다. 비상장기업이 자사주 출연 방식으로 공익재단을 만든 최초의 사례였다.
오미디아는 2004년 회장직만을 남겨놓고 이베이의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뒤 아내와 사재를 털어 ‘오미디아 네트워크’를 설립했다. 공익재단과 벤처캐피털을 합쳐놓은 형태인데 사회적 가치와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임팩트 투자를 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현재까지 쓴 돈만 10억달러(약 1조1,325억원)에 달한다. 사회적 기업가정신 지원 기관 아쇼카재단, 개인 간(P2P) 소액대출 플랫폼 키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운영하는 위키미디어재단, 저작권 공유를 위한 비영리단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등이 오미디아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았다.
성공한 인터넷 기업가들이 사업 확대에 전념할 때 오미디아 부부는 사회공헌 활동을 전방위로 확장하는 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인신매매, 대규모 잔혹행위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휴머니티 유나이티드를 설립했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건강을 지원하는 호프랩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데모크라시 펀드를 만들었다. 오미디아는 대안 언론매체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기밀문서 폭로를 주도한 영국 가디언의 글렌 그린월드 기자와 손잡고 언론 기업 퍼스트룩 미디어를 만들었고, 이듬해 가짜 뉴스와 싸우는 온라인 탐사보도 매체인 ‘인터셉트’를 출범시켰다. 탐사보도를 소재로 한 영화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포트라이트’ 제작에도 참여했다.
오미디아는 “기부는 제2의 사업”이라고 말한다. 그가 회사 경영보다 사회공헌에 정열을 쏟는 것은 사람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서다. 오미디아 네트워크를 설립하며 그가 남긴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사람들의 힘을 믿습니다. 또 사람들이 직접 행동으로 옮기면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한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등한 기회를 갖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선하고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베이를 설립할 때 가졌던 가장 중요한 믿음이고 여전히 우리의 삶과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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