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2015년 극장가가 이 한 마디에 발칵 뒤집혔다. 단물 빠진 정의감 대신, 예의와 격식, 배려와 존중 같은 인간의 기본 가치로 세상을 바로잡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킹스맨’)는 이 명대사와 함께 첩보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킹스맨 열풍’의 중심엔 혈기왕성한 신입 첩보 요원들의 멘토, 해리 하트를 연기한 콜린 퍼스가 있다. 영국 스파이는 007 제임스 본드처럼 여색이나 밝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품 있고 정중하고 섹시할 수 있다니, 뭇 여심이 술렁였다. 고풍스러운 런던 풍경의 일부인 듯한 퍼스의 클래식한 슈트 이미지는 후대를 위해서라도 영국박물관에 전시돼야 마땅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하트의 귀환에 극장가가 들썩이고 있다. 후속편 ‘킹스맨: 골든서클’(‘킹스맨2’)의 개봉(27일)이 일주일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연일 예매율 1위다. 매너를 평생의 신념으로 여기는 영국 스파이는 약속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1편 개봉 당시 미국에 이어 전세계 흥행수익 2위를 기록한 한국을 빼놓고 중국만 방문해 한국 관객을 서운하게 하더니, 이번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온다. 환갑을 바라보는 57세 나이에도 퍼스를 향한 판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브리짓의 남자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한때 그는 브리짓 존스의 남자였다. 보드카를 한 손에 쥐고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를 목청껏 부르며 홀로 쓸쓸한 새해를 맞이하던 브리짓에게 진심으로 다가온 남자 마크 다아시. 오만하고 까칠한 인권변호사인 그가 “있는 그대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브리짓에게 감정 이입했던 수많은 여성 관객이 자지러졌다. 눈사람이 그려진 넥타이마저도 그가 걸치면 세련미가 흘렀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는 2000년대 초반 한국 극장가에 로맨틱코미디 붐을 불러일으키며 퍼스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각인시켰다. 곧 이어 개봉한 ‘러브 액츄얼리’(2003)는 그 정점이었다. 이후 퍼스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2004)과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2016)까지 십 수년 세월을 다아시로 살아오며 중후함과 깊이를 더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인해 BBC 6부작 드라마 ‘오만과 편견’(1995)을 찾아 보고 뒤늦게 애정을 품게 된 팬들도 많다. 방영 시간만 되면 영국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다는, 퍼스의 출세작이다.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에는 없던, 미스터 다아시가 연못에 빠져 젖은 셔츠 차림으로 걸어 나오던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이 장면으로 퍼스는 ‘섹시 심볼’로 자리매김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이 드라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다아시라는 이름도 가져왔다. 헬렌 필딩이 쓴 원작 소설에는 브리짓이 리포터로 퍼스를 인터뷰 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다양한 출연작, 빼어난 연기력
퍼스를 로맨틱한 이미지로만 기억해서는 서운하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의외로 다채롭고 풍성하다. 영화 데뷔작은 두 청년의 사랑과 이상을 그린 ‘어나더 컨트리’(1984)였고, 수 차례 영화화된 18세기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를 스크린에 옮긴 ‘발몽’(1989)에서는 사랑의 허영을 조롱하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고전 시대극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와 판타지 가족영화 ‘내니 맥피-우리 유모는 마법사’(2005),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2008)까지 출연 장르도 다양하다.
연기력은 더 출중하다. 오랜 동성 연인을 잃고 상실감에 젖은 대학교수로 열연한 ‘싱글맨’(2009)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최우수남자배우상을 수상했고, 말더듬이 군주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담은 ‘킹스 스피치’(2010)로는 영국 아카데미영화상과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을 휩쓸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셰익스피어 때부터 이어진 배우 양성 시스템은 영국을 따라갈 곳이 없다”며 “퍼스도 영국의 전통적 기반 위에서 배우로 성장해 연기의 기본기가 탄탄하고 창의적인 캐릭터 해석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사회 의식까지 지닌 뇌섹남
퍼스는 인권활동가이기도 하다. 난민 강제 송환에 반대하며 구호 캠페인을 펼쳤고,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고발하기 위해 온몸에 커피를 뒤집어쓴 채 빈민 구호단체의 포스터도 찍었다. 난민 기사를 읽고 직접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울 방법을 물어봤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런던에서 아내와 함께 친환경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브렉시트에 반대해 이탈리아 이중국적을 신청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이 같은 사회 의식이 드러난다. ‘어나더 컨트리’와 ‘싱글맨’ 같은 영화를 통해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보여주고, 직접 제작한 ‘러빙’(2016)에선 타 인종간 결혼을 금지한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맞서 싸운 두 연인의 사랑을 그렸다. 퍼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는 그에게 지성미까지 부여했다.
김형석 저널리스트는 “배우로서 영국의 전통적 가치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인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배우 개인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드러내 양가적 이미지가 공존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양가적 이미지가, 의식 있고 지적이면서 섹시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까지 한 이상적 남성상을 무리 없이 설득시킨다”는 것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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