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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블랙리스트 대신 버킷리스트

입력
2017.09.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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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환하고 하늘 푸르른데 컴퓨터 모니터에 코 박고 일을 하려니 공연히 억울하다.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맛있는 음식, 멋진 여행지, 잘나가는 가족의 사진들로 도배되는 남의 페이스북이니 인스타그램, 단체 카톡방을 보면 씁쓸하기까지 하다. 누추한 사무실에서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남들의 화려한 인생을 엿볼 수 있는 SNS 천국, IT 강국이 갑자기 싫어진다. 게으르게 노닥거리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몸으로 출퇴근 지하철에 시달리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광고주 비위를 맞추려니 내 인생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건물주가 되기는커녕 주거불안에 시달리고, 평생 갑은커녕 을이나 병의 처지에만 머물게 되었을까? 곰곰 따져보니 30년 전, 바짓가랑이 붙들고 매달렸는데도 뿌리치고 가버린 그 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랑에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진작에 은퇴해서 쇼핑센터나 어슬렁거리는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광고수주를 위한 경쟁 프리젠테이션에서 우리 회사의 훌륭한 제안을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광고주 때문일 수도 있다. 그 PT만 수주했어도 회사가 상승세를 탔을 것인데 아쉽다. 한 달 꼬박 준비한 마케팅 제안을 받고 수정 보완한 2차 제안까지 요구하더니, 아직은 광고할 때가 아니라고 다음에 다시 부르겠다던 뻔뻔한 광고주도 있었다. 준비하느라 들였던 시간과 비용만 아꼈어도 ‘명품빽’ 몇 개는 살 수 있었을 게다.

어느새 나는 머릿속에 수첩을 펼쳐 놓고 본격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막내 초등 2학년 때 담임을 리스트 꼭대기에 넣었다. 명색이 OECD회원국의 교육 공무원인데 집에 쌀이 없는지 토요일마다 ‘고급’ 간식을 사오라고, 아이들 생일이나 소풍 때는 모든 교직원에게 먹을 것을 돌리라고 학부형들을 닥달했다. 남성 인체의 신비를 직접 보여준 동네 ‘바바리맨’이나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더듬던 성추행남도 명단에 빠지면 안 되는 인간들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의 지갑을 훔쳐간 소매치기, 면학분위기를 위한 ‘군기’를 잡겠다고 고3 모든 학급을 돌아가며 단체기합 뺑뺑이를 돌린 수학 선생, 광고주 접대 자리에 구색으로 여직원을 데리고 나가던 직장 상사…

명단을 적으며 나는 거기 적힌 인물들을 실컷 성토하고 원망하고 저주했다. 그런데 아무리 더 적으려 해도 내 블랙리스트는 20명을 채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스무 명 채우기도 어려운데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6,367명이나 된다니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

내친김에 혹시 블랙리스트를 소재로 만든 광고가 있나 검색해 봤다. 블랙리스트는 없고 ‘버킷리스트’만 많다. 아이디얼리스트, 스페셜리스트도 가끔 광고에 등장하고 작곡가 리스트도 눈에 띈다.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나쁜 것이면 새로운 것, 희한한 것을 찾아 목을 매는 광고에조차 쓰인 적이 없다.

2016년 제작된 캐논의 TVCM은 딸의 버킷리스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광고 속의 딸은 생전 거울도 안보는 엄마가 얼마나 예쁘지 사진이라도 찍어 보여주는 것이 소망이다. 카메라를 구해 그 소망을 이룬 뒤 딸이 얘기한다. 엄마 참 예쁘다고, 주름마저 곱다고.

자막) 거울도 안 보는 여자

딸O.V) 다 큰 자식 뒷바라지에

거울 볼 시간도 없는 그녀는

자기가 원래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도

잊어버렸다.

내가 확인시켜줄 거야.

주름마저 고운 얼굴

실물보다도 더 곱게.

이것 봐, 엄마 되게 예쁘지?

나의 포토 버킷리스트

EOS 80D로 이루다.

(캐논_EOS 80D_TVCM_2016_카피)

유난히 거울과 TV를 좋아하셨다던 박 전 대통령이 저 광고를 보고 블랙리스트 대신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실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청명한 가을날, 일 팽개치고 놀고 싶은 마음 붙들어 매느라 엉뚱한 공상만 어지러웠다.

(캐논_EOS 80D_TVCM_2016_스토리보드)

(캐논_EOS 80D_TVCM_2016_유튜브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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