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결혼한 민사린은 의욕이 넘친다. 사랑하는 남편 무구영과 가정을 꾸린 만큼 시부모님께도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다. 그는 직장에서 유창한 외국어로 미팅을 이끄는 똑순이답게 직접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리고 시키는 일도 척척 해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사린은 혼란에 빠진다. 시댁 식구가 먹다 남긴 과일을 ‘먹어 치우라’는 시어머니, 얼굴도 못 본 시할아버지 제사상 준비를 자연스럽게 떠맡기는 남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드라마나 영화 속 시나리오가 아니다. 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서 연재 중인 인터넷만화(웹툰) ‘며느라기’ 속 이야기다. 평범해 보이지만 누리꾼들의 반응은 뜨겁다. 구독자가 인스타그램에선 30만명, 페이스북에선 20만명이다. 이 만화는 ‘초현실주의 웹툰’으로 통한다. 주인공 민사린이 며느리로서 겪는 일들이 현실과 너무나도 똑같다는 실제 며느리들의 평가 때문이다. 웹툰의 주인공처럼, 대한민국의 며느리라면 누구나 시댁 식구와 친해지고 싶어 일부러 싹싹하고 친절해지는 ‘며느라기(期)’를 겪는다. 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가부장제 앞에서 며느리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그냥 ‘며느리'
이모(29)씨는 결혼 후 첫 번째로 맞이한 시어머니의 생신 때 직접 생일상을 차렸다. 결혼 전에는 요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친한 언니의 도움을 받아 미역국과 잡채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시부모는 물론 친정 부모나 친척들이 시킨 건 아니었다. 그저 첫 며느리로서 잘해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무뚝뚝한 성격의 남편이 시어머니 생일을 먼저 챙길 리도 만무했다. 이씨는 “큰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고 그저 시어머니께서 ‘며느리 잘못 봤다’는 말을 듣지 않길 바라며 했던 것” 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사랑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새 가족을 맞이하는 며느리들 역시 시부모와 좋은 관계를 쌓고 시가 친척과 허물없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이씨처럼 남편도 챙기지 않는 시부모의 생일상을 차리거나, 틈만 나면 시부모에게 안부를 묻고 찾아가서 식사 한끼라도 같이 하려고 한다. 전형적인 ‘며느라기’ 상태다.
인간관계에서 노력이 쌓이면 서로 가까워지는 법. 수평적인 가정에서 자라온 젊은 며느리들은 시댁에서도 이 공식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깨닫는다. 시댁과의 관계는 결코 수평적일 수 없고, 자신은 한 인간이 아닌 ‘며느리’란 역할로만 존재하게 되는 ‘낯선 현실’을.
결혼 4년 차 며느리인 김모(29)씨는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친정어머니와 함께 요리하는 시간을 즐겼던 그는 결혼 후에도 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같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가사도우미’ 같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밥을 다 먹기도 전에 ‘과일 깎아오라’는 소리가 들리고, 남편과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제사 때만 되면 김씨만 일찌감치 시댁에 와서 준비를 하는 생활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통적인 며느리상을 추구하는 시부모님 앞에서 김씨는 서서히 체념했다고 한다. “이번 추석 땐 가족여행을 가서 ‘도우미’ 신세는 면했지만, 아마 ‘여행가이드’처럼 바쁘게 부모님 수발을 해야겠죠.”
저도 집에선 귀한 딸이었어요
“어머니가 제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게 하셨어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늘 전적으로 응원해주셨죠.” ‘똑똑하고 귀한 딸’이었던 양모(40)씨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기업에 입사, 능력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시댁에 가면 그의 직업은 평가절하된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데도 시부모님은 오직 아들인 남편 칭찬만 할 뿐이다. 양씨는 “객관적으로 볼 때 남편보다 제가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이것 때문에 아들 기가 죽을 까봐 일부러 더 그러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위 ‘시집살이’의 강도는 약해졌다지만, 며느리들이 여전히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젊은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진출도 활발해지고 있지만 유독 시댁에만 가면 그들의 자아는 물론 사회적 성취까지도 가려지는 것이다.
이는 며느리에게 부여되는 ‘아내’와 ‘엄마’의 의무 때문이다. ‘며느라기’ 웹툰 속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1주일간 출장을 간다고 말하자 “무슨 유부녀가 집을 일주일이나 비우니, 그거 꼭 가야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는 ‘며느리가 집을 비우면 새신랑인 아들이 밥을 못 얻어 먹는다’는 아들 중심의 걱정이다. 이 같은 압박은 아이를 낳고 나면 더욱 커진다. 이모(32)씨는 “출산 후 복직한 것 만으로도 직장 내 입지가 흔들릴까 봐 고민인데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댁에선 ‘엄마가 집을 비운 탓’으로 돌려서 더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알아요, 시부모님도 노력하시는걸
21세기를 사는 젊은 여성들은 이처럼 며느리만 되면 20세기로 돌아간다. 하지만 자기주장도 강하고 똑부러진다는 젊은 세대들이 왜 시댁에서 겪는 문제는 대화로 풀려 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 김씨는 “시어머니가 제게 하는 건 본인이 며느리로서 당한 것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 이라고 답했다. 김씨의 시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시어머니, 즉 김씨의 시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생신상은 물론 매일매일의 거동도 일일이 챙기는 정성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어머니는 시할머니로부터 ‘남편 잘 받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제가 제사에 늦어도 크게 혼내지 않는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이 겪은 평생의 시집살이를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하시는 게 보여요. 이렇게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하다 보니 차마 강하게 말할 수가 없네요.”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에요
‘딸 같은 며느리’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결혼 10년 차인 양씨는 “그래도 며느리 역시 가족은 가족”이라고 말한다. 서로의 기대가 다르기에 오해도 생기지만, 살다 보면 정도 들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결국 며느리와 시부모 사이에 놓인 ‘남편’의 역할이다. 아내의 평생 동반자이자 실질적인 가족인 남편이 지속적으로 ‘대변인’이 되어주고 자발적으로 가사 부담을 나눈다면 고부간의 갈등을 완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고생한 만큼 남편도 함께 고생해야 한다’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고부간에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결혼 6년 차 구모(31)씨는 “웹툰 속 민사린처럼 혼자 제사를 다 떠맡고 뒤늦게 남편에게 화내는 대신, 둘 다 과도한 부담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한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수동적으로 따라온 관습을 재고하고 가정 내 새로운 역할관계를 모색하는 것, ‘며느라기’의 독자인 며느리들이 바라는 결론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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