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무대와 관객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관객은 무대에 펼쳐지는 연극이나 뮤지컬, 무용 등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극을 향한 시선은 직선으로 한 방향이기 마련이다. 지난달 21~30일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에서 공연한 서울예술단의 연극 ‘꾿빠이, 이상’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무대를 연출했다. 공연장 한 가운데에 작은 단상이 있고, 관객들은 공연장 4개 면에 마련된 계단형 객석에 앉아 공간의 가운데로 시선을 모았다. 무대는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이 무대가 됐다. 배우들은 관객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했고, 관객이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 곳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보이는 배우의 얼굴과 춤 동작이 달라졌다. 시선을 정면에만 고정하는 관객은 없었다. 2차원적인 여느 연극과 달리 ‘꾿빠이, 이상’은 3차원적 관극 체험을 선사한 셈이다.
‘꾿빠이, 이상’을 연출한 오루피나 연출가는 1일 “연출가가 보여주겠다고 의도한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무대에서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을 관객들이 보았으면 했다”고 말했다. 소설가 김연수의 동명 원작소설을 극작가 오세혁이 각색한 대본을 받아 든 순간 기존의 무대처럼 배우들의 입장과 퇴장이 있는 공연이 아닌 사방으로 사람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됐다고 오 연출가는 설명했다.
이런 연출을 가능하게 한 건 CKL스테이지의 극장 형태였다. CKL스테이지는 ‘블랙박스 극장(가변형 극장)’이다. 객석과 무대가 한 위치에 고정 돼 있지 않고 텅 빈 상자와 같은 공간이라, 객석과 무대는 공연에 따라 자유롭게 위치를 지정할 수 있다. 블랙박스 극장은 실험적인 무대를 연출할 때 자주 활용되는데, 최근 블랙박스 극장의 쓰임새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객석과 무대의 위치를 바꾸는 단순한 활용이 아니라 관객에게 능동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한 ‘프로시니엄’ 형태는 장면재현과 관객의 집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가장 널리 쓰인다. 관객과 완벽히 분리돼 관객의 참여는 최소화한다. 블랙박스 극장에서는 관객의 집중을 유도하면서 관객과 밀접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프론티어 트릴로지’는 무대를 가운데에 놓고 양 쪽에 각각 50여석의 객석을 놓았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 중인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도 이와 같은 구조인 2면 무대다. 배우들은 관객들의 코 앞에서 연기를 하고 관객은 배우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의 경계 없이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 5월 공연됐던 극단 진일보의 ‘바보햄릿’ 등은 이보다 더 나아가 객석과 무대의 경계까지 허물어 버렸다. 어느 공간이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블랙박스 극장에서 구현했다. ‘바보햄릿’은 무대 위에 30명이 같이 앉을 수 있는 객석을 만들었다. 4개 구역으로 나뉜 객석은 바퀴가 달려 공연 중에 위치가 변했다. 객석은 일렬로 놓였다가 마주 보기도 하고 사각형으로 배치되기도 하면서 연극 속 여러 공간들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무대의 변형은 배우와 관객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고, 관객에게 능동성을 부여한다고 연출가들은 입을 모은다. 오루피나 연출가는 “배우와 배우 간의 거리보다 관객과 배우 간 거리가 더 가까운 순간이 있을 정도”라며 “관객은 배우들과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참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언어로 된 대사가 없는 무용에서도 요즘 무대 활용이 두드러진다. 안무가 차진엽이 영국 예술가 대런 존스턴과 합작해 13~18일 무대에 올리는 ‘미인’도 무대에 대한 기존 틀을 깬다. 공연 장소부터가 독특하다. 41년 만에 ‘문화비축기지’라는 새 이름을 얻은 서울 상암동 옛 석유비축기지가 춤이 펼쳐지는 장소다. 차 안무가는 “관객의 위치를 규정해 놓지 않았다”며 “문화비축기지의 구조적 특성을 활용해 이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에도 ‘로튼 애플’이라는 작품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앤 작품을 선보였다. 하나의 무용 공연이 8개로 구분된 공간에서 한꺼번에 펼쳐져 관객이 돌아다니는 형태였다. 차 안무가는 “전시는 고정돼 있는 작품을 관객이 동선과 시간을 스스로 선택해 볼 수 있는 형태로, 관객들에게 더 자율성이 부여된다”며 “공연예술에도 이런 전시관람의 성격을 부여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블랙박스 극장의 활용은 무대 위의 배우와 무용가에게도 의미가 있다. 무대 위에서는 암전된 객석이 잘 보이지 않지만, 관객들과 직접 눈을 마주쳐야 하는 공연을 하다 보면 더 단련된다는 것이다.
국내 블랙박스 극장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다. 아직까지 관객들은 새로운 방식의 무대에 익숙하지 않고 가변형 무대에 어울리는 작품 소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립 시설 중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CKL스테이지 정도가 있고 세종문화회관이 내년 5월 정식개관을 앞두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극장의 다양성 확장을 위해 블랙박스 극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서울시극단뿐 아니라 무용단과 오페라단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가변형의 무대가 고정된 무대보다 항상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공연장마다 다르게 설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이 줄어들고 순회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실험성과 다양성 측면에서 가치는 충분하다. 지혜원 공연평론가는 “규모, 성격 면에서 다양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블랙박스 극장은 밀접, 몰입, 참여 등을 좋아하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관객을 포용할 수 있는 극장”이라고 설명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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