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뭉클한 순간을 고르라면, 주인공 나옥분(나문희)과 그의 절친한 이웃인 슈퍼마켓 주인 진주댁(염혜란)이 서로 속내를 터놓고 펑펑 울던 장면을 꼽겠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개한 옥분은 예전과 달리 자신을 피하는 듯한 진주댁을 찾아가 서운함을 토로한다. 진주댁은 옥분을 피한 게 아니라 토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 부대끼며 살았는데도 자신에게 아픈 사연을 털어놓지 않은 게 속이 상해서 말이다. 옥분이 기대어 마음껏 울 수 있게 진주댁은 따뜻한 품을 내어 준다. 관객까지 보듬는 위로였다. 배우 염혜란(41)이 선사한 웃음과 눈물이 스크린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염혜란을 먼저 알린 건 드라마 ‘도깨비’다. 여동생의 사망 보험금을 노리고 조카 지은탁(김고은)을 구박하던 못된 이모를 어떻게 잊을까. 그보다 앞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극중 나문희의 딸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순영을 연기해 여러 시청자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염혜란의 변검술 같은 연기에 ‘농락’ 당하는 기분이 꽤 짜릿하다.
‘아이 캔 스피크’를 보자마자 염혜란에게 만남을 청했다. 아직 인터뷰가 낯설다는 그를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김현석 감독이 옥분과 진주댁이 함께 우는 장면에 음악을 넣었다가 연기만으로도 감정이 충만해서 다시 음악을 뺐다고 하더라.
“영화를 볼 때 긴장해서 그 장면에 음악이 깔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많은 분들이 좋게 봐 주셨지만 배우 욕심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 깊은 감정을 담아내지 못해 속상하기도 하다. 한번만 더 촬영하겠다고 먼저 말했어야 했나 싶어서 그 장면을 찍은 날 잠도 못 잤다(웃음).”
-그만큼 많이 고민한 장면인가 보다.
“감독이 이런 얘기를 했다.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주변에서 우는 사람은 진주댁 한 명이었으면 좋겠다고.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감독이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이 장면을 배우에게 오롯이 맡겨줬다.”
-생활 연기가 탁월했다.
“시장 상인 같은 서민 역할은 연극에서 많이 해봤으니까(웃음). 그런데 진주댁은 억척스럽기보다 사근사근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이었다. 가게 물건을 깔끔하게 정돈했듯, 외모도 예쁘게 꾸밀 것 같았다. 고향 집에 가서 친언니가 대학 시절에 착용하던 진주귀걸이를 가져와서 활용했다. 애초 평범했던 의상도 시스루와 레이스 의상으로 바꿨다. 상투적인 역할을 상투적으로 연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산 사투리가 찰지다.
“사실 전남 여수가 고향이다. 부산 사투리를 배우느라 엄청 고생했다. 그 지역 출신 스태프에게 물어보면서 연기했다. 감독에게 ‘전주댁’으로 바꿔주면 안 되냐고 물으니 ‘부산 서면 아재개그’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라(웃음).”
-나문희와는 연극 ‘잘자요 엄마’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이다.
“어머니가 ‘나는 낳기만 했지, 너는 나문희 딸이야’라고 하시더라. 앞의 두 작품에선 모녀 사이였다. 아주 지독한 삶을 사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단련이 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생님 앞에서 긴장해서 입도 못 뗐을 것 같다. 그런데 족발집 사장 혜정을 연기한 이상희는 선생님과 곰탕을 먹고 바닷가를 산책했다더라. 나는 못해봤는데. 질투가 났다(웃음).”
나문희와의 인연은 연극에만 매진했던 염혜란을 카메라 앞으로 이끌었다. 나문희와 친한 노희경 작가가 연극 ‘잘자요 엄마’를 보러 왔다가 나문희를 통해 출연 제안을 했다. 그 드라마가 ‘디어 마이 프렌즈’였다. 이후 드라마 ‘더 케이투(The K2)’에 단역으로 나온 염혜란을 눈여겨본 캐스팅 디렉터가 ‘도깨비’에도 추천했다. 짧은 등장이지만 그의 연기는 드라마에 빛깔과 윤기를 더한다. 염혜란의 숨겨진 진가를 눈 밝은 연출자들이 모를 리 없다. 염혜란의 차기작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출한 신원호 PD의 신작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겠다.
“한참 드라마가 방송되던 때는 동네 꼬마들까지 알아보더라. 딸과 목욕탕에 갔더니 주변에서 쑥덕거리기도 하고. 그렇다고 순식간에 삶이 바뀌는 건 아니다.”
-영화 드라마 진출이 늦은 편 아닌가.
“끊임없이 연극을 하면서 간간이 영화 단역 출연을 했다. 그러다 2012년 출산하면서 연극을 한동안 쉬었다. 그때 영화 ‘해무’의 대사를 전라도 사투리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내가 활동했던 극단의 연극이 원작이다. 뜻하지 않게 단역 출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기회가 생겼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어떤가.
“나를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서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사실이 아직도 쑥스럽다. 드라마는 또 다른 프로들의 세계더라. 당분간 드라마와 영화 연기에 집중하면서 경험을 쌓고 싶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이제 막 첫 발을 뗐지만 연극계에선 명성이 자자한 베테랑 배우다. 송강호와 김윤석 등이 거쳐간 극단 연우무대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연우무대 출신들이 모인 극단 이루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극 ‘차력사와 아코디언’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등 숱한 무대에 올랐다. 동아연극상 신인상,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 서울연극제 연기상 등이 뒤따랐다. 지금도 염혜란은 자신의 뿌리를 마음에 되새기며 카메라 앞에 선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나.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다들 잘한다고 칭찬하니 나에게 무슨 재능이 있는가 보다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무슨 꼬임에 빠졌냐’고 하시더라(웃음). 대학 졸업한 뒤엔 출판사에서 잠시 일했는데 결국엔 뛰쳐나갔다. 대학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연우무대 단원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렇게 유명한 극단인 줄 몰랐다. 심지어 길을 헤매서 오디션에도 늦었다. 그때가 1999년이니까 20년 가까이 연극만 해온 셈이다.”
-연극배우 생활이 고되진 않았나.
“쉬지 않고 공연을 했다. 그런데 1년 수입을 결산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경제적인 문제는 모든 연극배우들의 고민일 거라 생각한다.”
-최근에도 공연을 했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앙코르 공연이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짜릿했다. 내 연기 근육은 연극에 맞춰져 있다. 이제 다른 근육도 써보고 싶다. 한 가지 연기만 해서는 다른 근육을 찾기 어렵다. 여러 근육을 잘 단련시켜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 영화 연기를 하면서 자만했던 나를 돌아보게 됐다. 두렵지만 재미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값진 수업이었다. 많이 배웠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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