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에 목마른 아세안
언론 “최대 흑자국은 한국” 보도
자국 부품 조달 비율 확대 압력
자원도 가공 없인 유출 불허
#협력 통해 ‘황금알 거위’ 키워야
현지업체서 중간재 조달 등
끈끈한 관계 유지해야 성공 가능
비관세장벽 등 복병에 보험 역할도
국제 사회는 냉혹하다. K팝과 같은 한국의 대중문화가 동남아에서 인기를 끌고, 그 덕에 한국에 대한 그들의 호감도가 올라가면서 국내 기업들이 비교적 쉽게 진출하고 있지만 국익이 걸린 대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 분야는 물론 수교 25주년을 맞아 사회, 문화 분야에서 왕성하게 교류하고 있는 베트남에서도 이 같은 모습이 확인된다.
최근 베트남 기획투자부(MPI)는 3분기 무역수지를 발표했다. 지난 9월까지 수출 1,540억달러, 수입 1,545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9.8%, 23.1% 증가했다는 내용이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큰 비율로 증가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많은 현지 언론들은 “베트남을 상대로 한 최대 무역 흑자국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생산활동에 필요한 절대량의 중간재(부품)를 한국에서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없었다면 수출도 힘들었을 베트남이지만, 관영 매체들은 ‘한국의 이익’에 방점을 찍어 보도한 것이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업체 관계자는 이 같은 보도에 대해 “결국 현지 부품 조달 비율을 높이라는 베트남 당국의 압력으로 해석된다”라고 말했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성과 중 하나는 경제적 협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회원국들은 이 협력에서 누리는 과실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게 이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수린 피추완 전 아세안 사무총장은 “10개국 무역수지가 2조6,000억달러에 달하지만 아세안 내 자체 무역은 25%수준이고, 75%가 역외 거래”라며 “역내 교역이 늘진 않고선 이 지역 발전이 어렵다”고 말했다. 아세안에 진출한 기업 상당수가 아세안을 값싼 인건비를 이용한 단순 조립기지로 이용하고 있으며, 보다 많은 자국과 역내 업체들이 현지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에게 납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아세안의 많은 나라는 다양한 채널로 자국 생산 제품의 국산화 비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부품뿐만 아니라 해당 생산 시설을 운용하는 데 있어 필요한 직원 급식 메뉴 같은 서비스까지도 자국 것을 이용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휴대폰 생산 공장을 베트남에서 돌리고 있는 삼성전자가 기회 날 때마다 협력사의 숫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달 초 베트남을 찾은 신종균 삼성전자 대표는 응우옌 쑤언 푹 총리와의 면담에서 현재 29개 수준인 베트남 현지 공급업체 수를 3년 뒤인 2020년 50개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실제 아세안에 진출한 많은 한국 기업은 ▦적합한 부품의 부재 ▦현지 업체의 기술력 부족 ▦현지 기업에 대한 신뢰 부족 등의 이유로 원자재와 혹은 중간재를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자원 대국 인도네시아의 경우도 신광업법을 통해 구리 원석 등 광물의 직접적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인도네시아 내 가공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 뒤에야 해당 자원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ㆍ코트라) 자카르타 무역관 관계자는 “이익 공유 차원의 정책으로 이해하지만 가공을 위해서 필요한 전기 등 관련 인프라가 부족해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2015년 아세안경제공동체(AEC) 출범 이후 경제 통합이 가속화 하고있는 상황에서 ‘상생’을 거슬러서 성공하기는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AEC 연구컨소시엄 사무국장은 “한국 기업들은 동남아 진출 시 협력업체들과 동반 진출하는 경향이 짙다”며 “현지 업체를 가치사슬에서 배제한 채 이뤄지는 활동은 향후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지 기업, 또는 역내 국가에 있는 자사 생산시설에서 중간재를 조달해 생산하는 방식으로 해당 지역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태국을 중심으로 아세안 진출 역사가 오래된 일본 자동차산업의 경우 사실상 100%의 중간재를 해당국 또는 역내에서 조달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아세안 정착을 위해서는 해당국의 경제체질 개선과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의 협력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박번순 고려대 경제통계학부 교수는 “한국은 주요 산업에서 압축성장을 한 경험이 있고, 중간기술에 목말라 하는 아세안은 우리의 이런 경험을 필요로 한다”며 “아세안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잘 키우는 것도 중국과 일본이 따라 하기 힘든 전략”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과거 삼성전자가 소니 등에서 은퇴한 수백명의 일본인 고문을 썼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정부 차원에서 국내 중장년층의 엔지니어를 아세안에 파견, 회원국 체질 개선을 지원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이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중간재 현지조달 비율을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끌어주고 밀어주는 협업은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복병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 될 수도 있다. 곽성일 사무국장은 “현지 정보 확보에 있어 현지 기업을 따라갈 수 없다. 현지 기업 협력관계를 구축할 경우 향후 등장할 다양한 비관세 장벽에도 대응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인수합병, 지분 투자도 효과적인 아세안 진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방콕ㆍ자카르타ㆍ호찌민=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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