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학교’에 실린 소설들은 우리에게 배움을 요구한다. 이 말은 박민정의 소설이 편한 읽을거리와는 거리를 둔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작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심리적 내면을 증폭시켜 작품 내부의 세계를 확장하는 경향의 단편 소설과 박민정의 소설은 다르다.
‘아내들의 학교’는 내면보다 한 인물의 삶이 형성된 역사적 조건 내지 정치‧경제적 상황들을 의식적으로 환기하면서 소설의 세계를 확장한다. 그래서인지 박민정의 소설은 보이지 않는 깊이에 집착하고 있다기보다 가시화가 가능한 표면을 촘촘히 다룬다는 인상을 준다. 이 표면에는 우리가 의식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사실들이 얽혀 있다. 가령 ‘행복의 과학’이나 ‘A코에게 보낸 유서’ 같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현대 일본 역사에 대한 감각이나 일본의 역사와 상호작용했던 한국의 정황에 대한 정보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 그래야만 작품의 인물이 겪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박민정의 소설은 독자 스스로 역사에 대한 감각과 타자의 삶에 대한 감수성을 사실을 바탕으로 재조정하도록 유도하는 미덕을 지녔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민정 소설의 인물들은 ‘세상의 모서리’에 자리한다. 그 모서리는 세계가 타자화한 삶의 역사가 교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이니치(재일동포), 고려인,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동성애 커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여성 등등. 이 나열만 보면 ‘아내들의 학교’에 실린 소설들이 타자화된 삶을 이해하고 그와 연대하려는 윤리적 고투를 다룰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민정의 소설은 타자화된 삶 속에 작동하는 여러 힘의 논리를 좀 더 냉정하게 다루는 편이다. 그래서 ‘아내들의 학교’는 세상의 모서리로 타자를 몰아가는 문제적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도 꽤 공을 들인다. ‘청순한 마음’이나 ‘버드아이즈 뷰’가 좋은 예일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에 대해 윤리적 감수성이 훼손된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그렸다고 말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보다는 한 사람의 삶에 작동하는 권력을 해부하여 눈에 잘 보이지 않던 동시대의 삶의 조건들을 탐구했다고 평가하는 게 온당하다.
어떤 조건과 결합할 때 우리의 삶이 망가지고, 또 어떤 조건과 새롭게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삶이 좀더 나아질 수 있는지 작가는 소설을 쓰며 진지하게 묻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구체적인 현실적 조건의 변화와 무관한 정신승리적 서사나 감성충만한 이야기는 박민정의 소설과 거리가 멀다. 유물론적 사고는 박민정의 소설을 추동하는 주요한 힘이다. 한국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된 존재들의 삶의 조건이 바뀔 때 박민정의 소설 또한 새로운 전환을 보여줄 것이다. 박민정의 소설이 현실과 관계를 맺는 양상은 앞으로 한국 소설에 기대할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이다.
송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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