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는 게 쑥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피아니스트 김선욱(29)이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클래식 음악계 ‘젊은 거장’을 영화계 ‘신인 배우’로 마주한 자리였다. 김선욱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신작 영화 ‘황제’의 주인공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하는 그가 “배우”라는 호칭에 깜짝 놀라 얼어붙는 모습이 풋풋했다.
1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근처 카페에서 만난 김선욱은 “익숙한 분야가 아닌 새로운 예술 세계에 참여해 결과물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며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됐다”고 촬영 과정을 돌아봤다.
‘황제’는 삶의 벼랑 끝에 선 네 남녀가 김선욱의 음악을 통해 치유와 구원을 얻는 여정을 심미적으로 그린 영화다. 중요한 순간마다 마주치는 소녀는 세월호의 아픔을 은유한다. 카메라는 영국과 이탈리아, 헝가리에서 김선욱이 공연하거나 홀로 연습하는 장면을 담아 왔고, 김선욱은 앙상한 숲과 들판 한가운데서 이 영화만을 위해 연주했다. 때로 폐허 속을 말 없이 걷거나 바다 먼 곳을 응시하며 ‘연기’도 했다. 아름다운 영상과 장엄한 음악이 어우러져, 고요하지만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
‘벌이 날다’(1998ㆍ이하 제작연도)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 ‘터치’(2012) ‘사랑이 이긴다’(2014)를 연출한 민병훈 감독은 2013년 정명훈 지휘로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과 김선욱이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연주회를 보고 크게 위로를 받아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뜻밖의 영화 제안이었지만 김선욱은 “도전이나 결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듬어 주기 위해 음악이 존재하듯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연기를 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배워서 할 자신도 없었지만, 제 연주가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연주 활동에도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어요. 때로 내가 영화를 찍고 있기는 한 건가 싶었죠. 감독님이 연기를 주문한 건, 잠시 걸어보라거나, 뒤돌아보라거나, 생각에 잠겨보라는 것 정도였어요(웃음).”
18세 때인 2006년 리즈국제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한 김선욱은 영국 런던을 근거지로 유럽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완주하는 등 베토벤에 천착해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영화엔 ‘황제’를 비롯해 피아노 소나타 ‘월광’과 ‘비창’ 등 그가 연주한 베토벤 음악이 실황으로 실렸다. 김선욱은 “자신에게 닥친 지독한 운명을 음악으로 승화한 베토벤의 인생과, 영화가 담고 있는 치유라는 주제가 서로 통한다”고 말했다. “슬플 때 기분 좋아지는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슬픈 음악을 찾기도 합니다. 스스로 감정 상태를 인지하기도 전에 음악은 그 감정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란 수단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영화 속 김선욱은 주제를 품은 이미지로서도 존재감을 지닌다.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걸 몰랐던 관객이라면 ‘배우’로 눈에 새길 것 같다. 민 감독은 “연주 장면 자체가 영화적인 그림”이라며 “김선욱 고유의 매력이 굉장한 흡인력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고 거들었다. 민 감독의 칭찬에 김선욱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황제’는 극장 배급 대신에 공동체 상영으로 직접 관객을 찾아갈 예정이다.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김선욱은 생애 처음 방문한 영화제에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12일 개막식에서 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를 추모하는 연주를 했고,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 뒤엔 관객들을 직접 만나 대화했다. 14일에는 부산 해운대 야외무대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가을 밤을 적셨다.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영화를 함께 만든 사람들과 그 지인들을 초대해 조촐한 미니 콘서트도 열었다. 부산의 맛과 낭만을 즐기는 뒤풀이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영화의전당 지하에 연습실을 마련해 이달 셋째 주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연주회를 준비했다. 인터뷰 스케줄 사이에 1시간 여유가 생기자 또 피아노로 달려갔다. “정말 중요한 공연인데 연주 프로그램이 많아서 긴장된다”고 걱정하던 그는 15일 독일로 출국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예술이냐는 얘기들을 하잖아요. 신문의 1, 2면에도 먹고 사는 문제와 밀접한 정치, 경제, 사회 기사만 실리죠. 예술의 자리는 항상 TV 편성표 앞이에요. 하지만 먹고 사느라 바쁘기 때문에 예술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아요. 음악도 그렇고요. 저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은 모든 걸 잊어 버려요. 마치 마법 같아요. 그게 바로 예술의 힘이죠. 관객들이 이 영화를 편견 없이 즐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치유 받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잊어버릴 만큼요.”
부산=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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