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레넌, 마크 트웨인, 키케로, 몽테뉴. 모두 잠을 끔찍이 사랑했다. 전구를 발명해 인류의 밤잠을 줄이는 데 기여한 토머스 에디슨도 매일 몇 시간씩 낮잠을 잤다. ‘잠 많은 위인’이라니, ‘월요일을 기다리는 직장인’ 만큼 낯설다. “낮잠을 잔다고 일을 덜 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그런 생각이야 말로 멍청함의 극치다.” 처칠의 시원한 일갈이다.
그러나 누구나 잠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경쟁사회가 잠을 게으른 잉여라고 매도한 탓이다. 밤잠은 모자라게, 낮잠은 몰래 자는 게 현대인의 생존 수칙이다. 그래서 요즘 뜨는 게 ‘수면 카페’다. “화장실이나 계단참에서 꾸벅꾸벅 조는 건 비참하다, 잠깐이라도 푹 쉴 수 있다면 1만원쯤은 낼 수 있다, 점심시간만이라도 사회생활에서 풀려나고 싶다…” 그런 을들이 찾는 곳이다.
시간에 쫓겨 낮잠을 산다, ‘패스트 힐링’
수면 카페 이용 비용은 시간당 만원 안팎. 한 시간 동안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기 위해’ 돈을 쓰다니, ‘통장 요정’ 김생민은 “스튜핏!”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체험해 봤다.
서울 명동 수면 카페 ‘미스터 힐링’. 산소가 나온다는 ‘산소 존’에서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마 의자에 누웠다. “불 꺼진 조용한 방에서 강도를 조절해 가며 전신 안마를 받으니 온 몸의 근육이 풀렸다. 어머니 자궁에서 쉬는 듯 편안했다.”(현지호, 박혜인 인턴기자) 요금은 50분에 1만3,000원. 매일 12시가 조금 지나면 18석이 다 찬다. 서울 역삼동 수면 카페 ‘쉼스토리’에선 안마 의자, 침대, 소파 중에 골라 자거나 독방에 누워 헤드폰을 끼고 TV를 볼 수 있다. “점심시간을 대충 때우는 게 아니라 제대로 쉬려는 수요를 읽고 창업했다. 하루 평균 70여명이 온다. 20~30대 대리급 직장인이 많다. 제일 피곤한 시기니까.”(정운모 대표)
서울 여의도동 CGV는 관객이 적은 평일 극장을 수면 공간으로 바꿨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지친 오후에 즐기는 낮잠인 시에스타(Siesta)에서 딴 ‘시에스타 프로그램’이다. 만원을 내고 입장한 공간은 유럽 성당의 깜깜한 지하 기도실 같다. 침대처럼 180도 젖혀지는 리클라이너 좌석, 클래식 음악, LED 촛불, 허브차, 담요, 귀마개, 안대, 슬리퍼까지, 낮잠 자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경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이용객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몰린다고 한다. 월요일에는 월요병을 달래려고, 화요일에는 회식이 많은 월요일 밤 마신 술을 깨려고.
신한트렌드연구소가 6월 신한카드 이용 내역 빅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수면 힐링 카페 이용자는 20대(63%ㆍ2016년)가 제일 많고 ▦1년 사이 30대(199%)와 40대(209%) 이용 건수가 늘었으며 ▦20대는 오후에, 3040세대는 점심시간에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는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점심시간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3040세대는 점심시간에 쓰러져 자야 할 정도로 고달프게 살고 있다는 얘기다. 시내 병원들은 수면 카페를 모방해 ‘낮잠 자며 수액 맞는 서비스’를 내놨다. 마늘ㆍ비타민ㆍ태반주사 등을 골라 맞는 비용은 10만원 안팎. 낮잠의 호화 럭셔리 버전이다.
덜 일하고 밤에 더 자는 게 ‘진짜 힐링’
2000년대 초 낮잠 카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지구에서 제일 복잡하고 정신 없는 도시, 미국 뉴욕에서다. 20분 눈 붙이는 비용이 당시 15~20달러였다. 후딱 먹고 치우는 ‘패스트 푸드’처럼 ‘패스트 힐링’도 미국에서 넘어 온 문화인 셈이다. 패스트 힐링의 상륙은 늦은 감이 있다. 우리는 잠을 너무 조금 잔다. 지난해 한국인 평균 수면 시간(7시간41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국민 평균(8시간22분)보다 41분 짧다. 1년으로 따지면 1만4,965분(249.4시간)을 덜 잔다는 얘기다.
노르웨이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휠란 에릭센의 말대로, 현대는 속도다. 고로, 시간은 곧 돈이다. “아무리 쪼개 써도 모자란 시간을 낮잠이나 멍 때리기로 흘려 보내는 건 한심하지! 어차피 죽으면 영원히 잘 건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마른 수건 짜기를 스스로 강요하는 피로사회의 노예일지 모른다.
휴식과 잠은 낭비가 아니다. 20분 정도의 짧은 낮잠은 ‘파워 냅(Power Napㆍ원기 회복 낮잠)’으로 불릴 정도로 의학적 효과가 입증됐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1995년 연구는 “최적의 낮잠 시간인 26분을 자면 업무 수행 능력은 34%, 집중력은 54% 향상된다”고 밝혔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과학 기자 울리히 슈나벨은 저서 ‘행복의 중심, 휴식’(걷는나무)에서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 보면, 정신적으로 아무 작업도 하지 않을 때 우리 뇌 활동이 더 활발해진다. 그 사이 뇌가 신경세포인 뉴런을 다듬고 기억을 분류하며 경험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썼다. 미국 국립수면재단은 최근 성인의 권장 수면 시간을 하루 7시간에서 9시간으로 늘렸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편) 지혜의 왕 솔로몬도 3,000년 전 잠을 찬양했다.
단, 과유불급의 진리는 낮잠에도 적용된다. 이유진 서울대병원 수면의학센터 교수의 조언. “패스트 힐링을 즐기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 낮잠 직후엔 인지 기능이 순간적으로 좋아진다. 하지만 밤잠의 질은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밤에 푹 잘 수 있게 하는 수면압(수면항상성)은 내리 깨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올라가기 때문이다. 낮잠을 매일 한 시간 이상 자거나 주말에 두 시간 이상 몰아 자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잘 시간에 일하고 술 마시는 생활습관을 고치는 게 먼저다. 수시로 수액을 맞는 관행은 한국에만 있다. 잘 먹고 자주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패스트 푸드는 당장 허기는 달래 주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 패스트 힐링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패스트 푸드도, 패스트 힐링도, 을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게 문제지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현지호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영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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