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자유다.’ 예전에 어느 인도인 신부가 한 말이다. 해야 할 일을 허세를 부리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닌 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중략)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에게 외부 사람은 깊은 감사를 잊지 않고, 한편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있는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더없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개성시대를 맞아 ‘나만의 특별한 그 무엇’이란 게 찬미 대상으로 떠오른 뒤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온갖 종류의 ‘자아비대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신을 죽인 뒤 비빌 언덕이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은 게 바로 근대적 인간이며, 그 때문에 깜냥은 되지 않으면서 신의 자리에 올라 앉으려다 보니 겸허, 겸손,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감각 따윈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는 여러 철학자들의 한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주 짧은 에세이 68편을 모아둔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타인은 나를 모른다’(책읽는고양이)는 이 비대증을 꾹꾹 눌러주는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가령 나를 꽁꽁 묶어대고 있는 저 줄 때문에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는 하늘의 연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줄을 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줄만 없으면 좀 더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줄이 없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소중한 나를 만지작거리며 애지중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써뒀습니다. “나를 함부로 내세워 자랑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나만이 피해자인 양 자기 연민을 갖거나 자학하지도 않는다. 나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버릇을 들인다. 나를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좋은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올바르지 않느냐고 투덜대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한 부분을 충분히 인식할 때에만 겸허해지기도 하고, 상대의 마음을 알고 조심하며, 쉽게 화를 내거나 책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간신히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불순함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유아가 아닌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지름길을 원합니다. “좋은 것이 아니면 존재를 허용하지 말라고 하고, 지금도 나쁜 짓을 하면 참혹한 꼴을 당한다는 권선징악의 세상을 기대한다.” 세상의 평화는, 그런 유토피아처럼 다가오는 게 아닙니다. “극단적인 악인과 선인은 똑같이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적당히 사는 사람, 엉성한 사람은 사기꾼이 아닌 다음에야, 세상에 그다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완벽한 게 아니라 적당하고 엉성한 세상입니다.
이 책의 묘미는 내용 못지 않게 문체입니다. 유치찬란 수사 따윈 없이 간명한 말투입니다. 이 말투 덕에 언젠가 한번은 내 머릿속을 스쳤을 그 생각들이 명징하게 제 얼굴을 드러냅니다. 원제는 ‘착한 사람은 왜 주변을 불행하게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건 이 세상은 단 0.0000001초의 순간에라도 정의로워야만 한다고 믿는 강박을 말합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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