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노 최대 4만명 추정
한국 남성, 임신사실 알리면 잠적
남은 미혼모ㆍ아이 생활고로 고통
정부는 아빠 찾기에 뒷짐
변호사 선임 등 소송 준비 어려움
승소해도 양육비 아예 안 주기도
“언젠간 아빠를 한국에서 볼 수 있을 거야.”
필리핀 세부에 거주하고 있는 셀리나(41)씨는 학교에서 아빠가 없다고 놀림을 받고 돌아 온 딸 산다라(5)를 매번 그랬듯 또 ‘선의의 거짓말’로 달랬다. 산다라는 셀리나가 7년 전 교제하던 한국인 남성 A씨 사이에서 생긴 아이. 한국(Korea) 아버지와 필리핀(Philippine) 어머니 사이에 낳은 자식을 일컫는 ‘코피노’(Kopino)다. 자신의 눈이 한국인의 눈 같다는 친구들의 지적에 산다라는 최근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코피노는 한국 남성의 ‘무책임’이 낳은 사생아다. 1960년대부터 마닐라, 세부 등 필리핀 주요 도시엔 한국인 남성들이 넘쳤다. 주재원이 늘 가득했고,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에 유학생도 몰렸으며, 성(性) 관광 등을 목적으로 하는 관광객도 많았다. 이들은 필리핀 여성들을 쉽게 봤고, 이렇게 태어난 코피노는 최대 4만명까지 추정된다. 필리핀 여성과 자녀는 고스란히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코피노 문제가 제기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임신사실 알리면 잠적하는 한국 남성
2011년 1년간 필리핀 세부에서 어학연수를 한 김모(34)씨는 “어학원 내 한국 남학생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부터 피임도구를 미리 챙겨올 만큼 필리핀 여자를 한번 만나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아동 성착취 근절 시민단체로 코피노 아빠 찾기를 돕고 있는 탁틴내일 관계자는 “성매매 남성이 코피노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학생, 주재원 등 다양하며 코피노 엄마 역시 대학을 졸업하거나 강사로 일하는 등 고학력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코피노 아버지들 대부분은 멀쩡히 교제를 하다가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몰래 잠적을 한다. 셀리나는 2010년 대학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머물던 세부에서 자신을 한국 굴지의 중공업 회사에서 파견을 왔다고 소개한 A씨를 처음 만났다. 몇 번의 교제 후 갑작스런 임신. 셀리나는 이 사실을 알렸지만 A씨는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부정했고, 이에 상처 받은 셀리나는 고향 민다나오로 돌아갔다. 그는 딸을 낳고 A씨를 만나기 위해 세부를 찾았지만 A씨는 이미 주변을 정리한 뒤 한국을 떠난 뒤였다. A씨와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007년 마닐라에서 영어강사를 하다가 지인 소개로 다른 학원에서 일하던 한국 남성 B씨를 만났던 제럴딘(46)씨도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같이 키워보자”며 결혼까지 준비하던 B씨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휴대폰에도 이메일에도 답하지 않았다. 필리핀 내 코피노 지원단체인 WLK(위 러브 코피노)의 전 대표 구본창씨는 “조용히 주변을 정리한 뒤 갑자기 숙소에서 사라지는 게 다반사“라며 “그나마 약간의 돈이라도 쥐어 주고 사라지는 게 양심 있는 걸로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낙태 금기에 낳은 아이, 생활고의 압박
이렇게 생긴 아이들 대부분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80%가 넘는 필리핀에서 여성들은 금기 시 되는 낙태보다는 어떻게든 아이를 낳아 기르는 편을 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미혼모인 코피노 엄마들은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부터의 양육비 지원이 일체 없는 데다가 빈부격차가 뚜렷한 필리핀 사회에서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코피노 딸 은주(7ㆍ한국 이름 사용)를 홀로 키우는 조한나 발데즈씨는 재래 시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쇼핑백을 팔며 한 달에 단 10여만원 남짓한 돈으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필리핀 현지에서 은주 등 코피노 아동 30여명의 교육과 자립 등을 돕고 있는 동방사회복지회의 한 관계자는 “심한 경우 행상을 하거나 술집에서 일하고 있지만 생계비 이하로 버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셀리나 역시 제조업체의 화장품, 주방용품 등을 페이스북을 통해 홍보ㆍ판매한 뒤 얻는 수수료 10%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간다. 월세 3,000페소(6만6,000원)를 포함해 딸의 학비, 식비 등 최소한의 월 생활비 2만페소(44만원)를 벌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마저도 일정치 않은 탓에, 한국 시민단체로부터 한 달에 한 번 3만원씩 지원을 받는다. 셀리나는 “편견을 가지고 코피노 가정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지만 생활이 빠듯해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여유조차 없다”라며 “딸에게 아빠를 볼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 가장 슬프다”라고 말했다.
이런 코피노가 몇 명이나 되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현지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코피노 수는 5,000명에서 4만명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코피노 문제가 불거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정부를 포함해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직접 실태조사에 나선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아빠 찾기 나서지만, 신원확인부터 어려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코피노 엄마들 일부는 한국 남성에 대한 배신감에도 양육비 지원을 받기 위해 아버지 찾기에 나선다. 그렇다고 재결합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탁틴내일 관계자는 “대부분 상처를 이미 크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셀리나 역시 교제하던 당시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회사명만 안 채 아버지 A씨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A씨가 다닌다고 했던 직장명은 거짓이었고 실제 A씨는 해당 회사의 하청업체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만둔 뒤였다. 필리핀 앙헬레스에서 코피노 아동을 돕고 있는 김종란 선교사는 “교제 과정에서 한국 남성들이 영어 이름을 쓰거나 제멋대로 직업을 지어내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진 코피노 엄마는 30%가 채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아빠 찾기 어려움에 2015년 8월 코피노 아버지들의 사진과 실명을 올리고 제보를 받는 형식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설령 아버지를 찾는다고 해도 이들 대부분은 자식의 존재를 부인한다. 대부분 한국에서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본창 전 대표는 “소송이 시작되면 일부 아버지들은 필리핀 현지의 건달들을 고용해 코피노 가족의 집과 시댁까지 찾아가 소송을 취하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결국은 소송을 제기해 법원의 명령을 받아 유전자 확인 검사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유전자 확인 검사로 코피노가 친자임이 확인되면 자동 승소하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한국인 아빠와 코피노가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비자 발급의 어려움과 코피노 대부분 어린 아동이라 엄마가 함께 한국에 와야 하는 탓에 비용이 만만치 않다. 때문에 유전자 검사 업체가 한국 남성의 유전자를 채취하고 필리핀 현지 공항에서 코피노의 유전자를 가져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는 데만 적어도 수개월이 걸린다.
힘겨운 소송, 뒷짐진 정부
코피노 가족이 직접 한국에 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필리핀에서 한국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재직증명서 또는 사업자등록증(자영업자)ㆍ개인 은행 잔고 증명서ㆍ전년도 소득 납부 증명서ㆍ초청장 등 갖춰야 할 서류가 만만치가 않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한국 내 불법체류자 중 필리핀 출신이 4번째로 많기 때문에 서류심사를 까다롭게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지 코피노 지원 단체인 WLK 정진남 대표는 “심지어 법원에서 조정 신청을 위해 코피노 아동과 엄마를 한국에 오라는 서류를 제시해도 비자 발급을 거부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이유로 대부분 한국의 변호사를 선임해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지만 필리핀 현지에서 한국인 변호사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일부는 운 좋게 시민단체를 통해 무료로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비싼 수수료를 내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도 많다. 탁틴내일 측 역시 수년 간 변호사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다가 2015년 12월 코피노 소송 법률 지원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은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지원으로 간신히 셀리나의 소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외국인도 변호사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있는 ‘소송구조’ 제도가 있지만 필리핀 내 재산 증명 등 해당 서류를 준비하는 일이 까다로워 사실상 무용지물인 상황이다. 셀리나는 소송 제기 1년 6개월만인 지난 12일 산다라의 아버지인 A씨가 유전자 검사에 응하기로 해서 힘겨운 싸움이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2014년 6월 코피노의 첫 친자확인 승소 사례가 나온 뒤 2015년 5월 수원지법에서는 두 코피노 아들에 대한 과거 양육비 2,000만원과 성인이 될 때까지 매달 50만원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이 처음으로 나오는 등 코피노 아버지 책임을 묻는 소송이 탄력을 받고 있다. 법조계는 현재 코피노 관련 소송이 100건이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양육비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도, 문제는 지속된다. 코피노 양육비 청구 소송을 10여차례 담당한 변호사는 “양육비를 아예 안 주거나, 양육비 중 일부만 주는 경우도 많다”며 “양육비는 대개 월 20만~50만원인데 계속 안주면 감치 신청하거나 재산 압류 등 가능하지만 그것도 변호사를 선임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필리핀 여성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윤석희 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은 “한국인 아버지를 둔 코피노 문제는 단순한 양육비 다툼이 아닌 인권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라며 “코피노로 인한 국가적인 신뢰 저하 등을 고려할 때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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