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25일 제1967차 유엔 총회가 알바니아가 발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대표권 귀속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참석한 128개 회원국 가운데 찬성은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였다. 그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이 됐고, 중화민국(대만)은 국가로서의 국제법적 지위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그 결의안이 제2758호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이다. “(…) 유엔에서 합법적인 중국의 대표는 오직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임을 인정하며 유엔 및 관련 조직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장제스(蔣介石, 당시 총통)의 대표를 추방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 결의안이 가결되기 직전 대만 외교부장 저우슈카이(周書楷)는 의장의 양해를 구해 단상에 오른 뒤 유엔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했다.
유엔의 중국 대표권 문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부터 논란거리였다.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 안건으로 소집된 유엔 안보리에 소련대표가 불참한 명분 역시 대만의 중국 대표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알바니아 안과 유사한 발의는 1960년대 내내 반복됐지만, 미국과 서방의 반대로 매번 부결됐다.
1960년대 말 미ㆍ중 관계가 급격히 호전됐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 1월 취임 연설에서 미ㆍ중 수교를 언급했고, 그 해 7월 미국인의 중국 관광을 허용하고 12월 대중 무역 규제를 완화했다. 반면 중ㆍ소 관계는 급랭했다. 양국은 1969년 3월 우수리강 유역 ‘전바오(珍寶ㆍ러시아명 다민스키)’에서 국경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에 적의 적은 동지였고, 장제스 체제의 대만은 부패와 독재 외에도 ‘본토 수복’을 위한 무력 도발 등으로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는 골칫거리였다. 그 결과가 1971년의 유엔 총회였다.
이후 대만은 유엔뿐 아니라 모든 국제기구에서 쫓겨났고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고립돼 갔다. 대만은 ‘중화 타이베이’ ‘중국 타이베이’ 등의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등에 가입해야 했다.
‘양안(兩岸)관계’라 불리는 중국ㆍ대만 관계는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는 대만 국민당과 독립을 선호하는 야당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집권 여부에 따라 얼고 풀리기를 거듭하고 있다. 당연히 중국은 ‘하나의 중국’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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