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겠다” “나쁜 짓 하겠다”
헤어지자는 말에 협박 있어도
경찰, 신고자들 고통 외면
피해자는 심각한 위협 느끼는데
일반 폭행ㆍ상해와 똑같이 처리
“처벌할 수 있는 관련법 마련해야”
직장인 김모(24)씨는 요즘 밖에 나가는 게 무섭다. 2년 반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한 게 3개월 전. 그때부터 그의 괴롭힘은 집요했다. 직장이나 집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나타나 놀라게 하는 것은 기본. 메신저로 “안 만나주면 나쁜 짓을 하겠다”거나 “나 버리면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이 연일 계속됐다. 일상생활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경찰도 도움이 안 됐다. 26일 오후 서울 관악경찰서를 찾았지만 “폭행 피해를 당하거나 하면 112신고를 하고 다시 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씨는 “당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데 법적으로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떠오르고 있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경찰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보복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억누른 채 경찰서로 어렵게 발걸음을 떼지만 신체적으로 또는 성적으로 물리적 폭력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대답을 듣기 일쑤. 피해자들은 “심리적인 공포와 고통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터뜨린다.
얼마 전 경찰서를 방문한 정모(31)씨 역시 유사한 경험을 했다. 헤어지자는 말에 사귈 당시 찍은 노출 사진을 보내면서 “나에게 이런 사진이 더 많다”고 하는 전 남자친구를 신고했지만 경찰은 “직접적인 협박 흔적이 없어 입건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직접적으로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게 경찰이 설명한 이유다. 대학생 한모(25)씨는 “남자친구 집착이 너무 심해 경찰에 상담을 요청했는데, 경찰에서는 ‘사랑해서 그런 거 아니겠냐’ 식으로 이해를 종용하더라”고 했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연합회 대표는 "남성과 여성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협은 일반 협박 사건보다 피해자에게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인데 현실에서는 이를 제대로 처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피해 여성들은 이 같은 안이한 대응이 결국 데이트폭력의 강도를 키우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경찰청이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데이트폭력으로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피해자만 25명에 달한다. 8월 경기 남양주시에서는 4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데이트폭력 관련 법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신고 시 보복 우려가 있고 재범 가능성도 높은 데이트폭력을 일반 폭행이나 상해 사건과 똑같이 처리할 수밖에 없어 경찰로서도 물리적인 폭력 등이 동반됐는지 여부를 따져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일선 경찰이 정신적ㆍ언어적 폭력에 관대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데이트폭력을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하루빨리 제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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