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쩍 갈라지는 등 근육 멋져서…
발레복 로망에… 이유는 제각각
직장인들 우아하게 스트레스 해소
1,2년 사이 유행… 요가 열풍 보는듯
“더 멀리, 멀리. 자 다시요~”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 골목의 발레교습소 ‘더 시티 발레’에선 10여명의 수강생이 발끝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강사의 목소리에서 인내심이 느껴졌는지 교실에 민망한 웃음이 작게 퍼졌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음악에 스커트를 나풀대며 힘차게 뛰는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보는 발레에서 하는 발레로, 발레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운동, 치료, 혹은 재미로 발레를 하는 일반인들이 늘면서 소위 ‘백조’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발레가 대중의 영역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 국립발레단 홍보팀에서 근무했던 김민지 ‘유스발레 컨서바토리’ 강사는 발레의 문턱이 낮아진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발레’하면 공연을 보는 것만 생각했지 누가 그걸 운동으로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주변에 운동한다는 사람 중에 발레하는 사람이 꼭 끼어 있어요. 국립발레단 공연에 온 관람객만 봐도 과거엔 주로 무용 전공자들이었다면 최근엔 일반인들이 눈에 띄게 늘었죠.”
2003년부터 서울 마포구에서 발레학원을 운영해온 이현진 ‘지니발레아카데미’ 원장은 발레 열풍을 몸으로 느낀 게 “최근 1, 2년 사이”라고 말한다. “10여 년 전 요가 열풍이 불었을 때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학원 초기 땐 찾아오는 분들이 거의 발레 마니아나 다른 무용을 하던 분들이었는데 이젠 발레와 전혀 관계 없는 일반 직장인들이 대다수예요.”
홍대, 강남 등 번화가에 집중돼 있던 발레학원이 골목까지 퍼진 것도 주요한 변화 중 하나다. 주로 발레 전공자를 가르치던 학원에서 성인 수강생 수요가 늘자 취미반을 추가로 개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많은 연령대가 30대예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하는 나이죠. 남자 수강생이 늘어난 것도 큰 변화입니다.” 지니발레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남자는 10명 중 1명 꼴이다. 적어 보이지만 “10년 전엔 100명 중 1명이었으니 10배 늘어난 셈”이라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밖으로 나온 근육이 안으로… 체형변화 실감해
취미 삼아 발레를 시작하는 이들의 사연은 천차만별이다. 척추측만증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발레를 권유 받은 사람, 원래 하던 운동이 너무 쉬워서 발레로 갈아탄 사람, 발레의 복장과 동작이 불러 일으키는 동화적 판타지에 매료된 사람 등 다양하다.
올해로 발레를 3년째 하고 있는 이진영(가명ㆍ37ㆍ학교 교사)씨는 원래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였다. 수영, 암벽 등반 등 온몸의 힘을 소진시키는 운동을 주로 해온 이씨는 “심적으로 안정된다”는 동료의 추천으로 발레를 시작했다. “저에게 운동은 육체적 단련의 개념이 가장 컸어요. 그런데 발레를 하면서 운동에서 얻을 수 있는 게 그것뿐이 아니라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근육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발레의 매력에 빠져, 주 1회였던 발레 시간은 현재 주 6회로 늘었다. 여기에 한 달에 세 번 개인 레슨까지 받는다는 이씨가 발레를 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체형 변화 때문이다. 그는 “외향적이었던 근육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예전엔 보는 사람마다 체대 나왔냐고 물을 정도로 근육질이었어요.(웃음) 발레는 보는 것과 달리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운동이지만 수영이나 암벽 등반과 달리 주로 안쪽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체형이 확실하게 변하더라고요. 옷태가 달라진다고 할까요. 바뀐 게 눈으로 보이는 순간, 빠져 나올 수 없게 돼요.”
취미 발레인으로 시작해 지금은 ‘더 시티 발레’의 실장으로 있는 손지연(35ㆍ학원 강사)씨도 발레가 만든 근육에 반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서른 살에 “일만 하긴 억울해서” 처음 발레 학원에 발을 들였다는 그는 “쩍쩍 갈라지는 여자들 등근육”에 반해 발레에 빠졌다. “발레에는 공주 같다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굉장히 강하고 절도 있는 운동이에요. 1번 자세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라 발레를 하는 동안엔 직장이나 집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싹 잊을 수 있어요.”
이 밖에도 “키가 3㎝나 컸다”, “생리통이 사라졌다”, “겸손해졌다” 등 발레 애호가들의 간증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들 모두 “발레가 처음부터 재미있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초보자도 일단 흉내는 낼 수 있는 요가와 달리 발레는 진입장벽이 높은 운동이다. 발레 학원을 처음 찾은 이들은 수영복과 비슷한 레오타드 아래 삐져 나온 자신의 엉덩이 살과 마주해야 하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들 앞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그러나 이 높은 난이도가 역으로 취미 발레인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발레 1년 8개월 차인 박영서(가명ㆍ27ㆍ패션 마케터)씨는 포털 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들어 자신의 발레 일기를 올린다. 어려운 동작을 성공했을 때의 기쁨, 잘 안 되는 동작에 대한 슬픔 등 오로지 발레 이야기만 하는데도 하루 방문객이 300명이 넘는다. 박씨는 그 이유를 ‘백조가 아닌 자들’의 공감대에서 찾는다.
“발레는 예술이잖아요. 이미 몸이 굳은 성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발레리나처럼 될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끼리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거죠. 블로그를 통해 서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격려해주는 등 관계가 꽤 끈끈해요(웃음). 요즘 좋은 발레 학원이나 예쁜 발레복을 파는 쇼핑몰 같은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요.”
남녀노소 누구나, 단 6세 미만은 예외
10월 30일~11월 5일 국내 최초로 열리는 취미 발레인들의 축제 ‘발레 메이트 페스티벌’은 발레 대중화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다. 업계에서는 취미 발레 인구가 한국의 2,3배인 일본을 따라 발레 대중화가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발레 학원 중 초보자들은 어떤 곳을 골라야 할까. 김민지 강사는 “진도만 나가는 학원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발레는 안면근육부터 손가락 근육까지 전부 쓰는 운동이라, 제대로 하면 약이지만 대충하면 독이 돼요. 근육의 움직임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될 때까지 시키는 학원이 좋습니다.” 그는 모든 성별과 연령대에 발레를 추천하지만 “6세 미만 어린이는 예외”라고 말했다. “조기교육 한다고 걸음마만 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발레는 어느 정도 이해력이 없으면 배워도 소용이 없어요. 음악엔 영재가 있을 수 있지만 발레는 영재가 없습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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