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TV 프로그램 ‘백종원의 푸드트럭’을 즐겨 본다. 외식사업가 백종원 대표가 ‘초짜’ 푸드트럭 주인들을 지도하며 장사 요령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가끔 아내 옆에서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도 홀딱 빠져든다. 요리나 요식업 창업에 관심이 없는데도 그렇다. 뭔가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고, 학생이 성장하는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인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방송에 나오는 초보 장사꾼 몇 분은, 처음에는 분명히 장사에 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백 대표가 정신무장과 의지력만 강조했다면 아내나 나나 3분도 참고 보지 않았을 게다. 그가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질적인 조언을 해줬기 때문에 “도움 되는 이야기다, 들어볼 만 하다”고 여겼다. 아마 출연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방송을 보면서, 그런 가르침에 나도 아내도 무척 목말라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 반응도 우리 부부와 비슷한 것 같다. “저런 귀한 비법을 아낌없이 공개하는 백 대표의 인간성에 감탄했다”는 찬사도 근본은 같다고 본다. 그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달리 없으니까 그 가르침이 귀한 비법이 된 것이다.
“강명아, 이건 이래서 이런 거고 저건 저래서 저런 거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코치를 늘 애타게 바랐지만, 살면서 그런 선배를 누린 적은 많지 않다. 내 경우에는 소설을 습작할 때 그런 조언을 구하며 작법서를 꽤 읽었는데, 작법서 내용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아내는 자기가 직장생활 초반 얼마나 막막했는지, 돌이켜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들을 많이 저질렀는지에 대해 지금도 종종 이야기한다.
우리 부부는 대개 아내가 스승이자 조교이지만, 나도 한번은 아내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다. 회사에서 너무 많은 업무지시를 받은 아내가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였다. 퇴사를 고려하는 아내와 그 무렵 맥주를 자주 마셨다. 그런데 아내의 사무실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어떤 프로젝트는 안 해도 되고, 어떤 규정은 지키는 시늉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그렇게 제안했고, 내 조언을 따른 아내는 몇 달 뒤 내 말이 옳았다며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걸 어떻게 안 거야? 그런 요령을 어디서 배웠어?” 아내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군대에서 배웠다고. 워낙 바보스러운 명령이 많아서 그걸 다 따르다 보면 살 수가 없었다. 식목일 아침에 갑자기 한 트럭 분량의 묘목을 주며 연병장 앞에 심으라는 지시 같은 거. 우리는 대충 심는 척 하다가 나중에 그 묘목들을 소각장에 갖다 버렸다. 불합리한 지시라고 무조건 뭉개도 되냐 하면 절대 아니다. 간부의 진급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게 최우선이다. 그러니 누가 진급 대상인지, 그가 어떤 성격이고 무엇을 중시하고 누구 눈치를 보는지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 회사생활도 별 다를 바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남자들은 그런 걸 군대에서 배우는구나.” 아내가 감탄조로 말했다. 아내도 피 끓는 시절은 이미 지난 상태였다. 십 년쯤 전이었다면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그런 부조리에 익숙해지는구나, 한국의 ‘적당히 대충대충’ 문화가 그렇게 이어지는구나”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 비판도 옳다. 그러나 나와 아내에게는 부조리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만큼이나 당장 우리에게 닥친 부조리를 모면할 수 있는 요령도 간절히 필요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비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백종원의 푸드트럭’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백 대표의 조언을 아무리 모아도 한국 요식업과 자영업의 어떤 부조리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모든 푸드트럭 운영자들이 백 대표의 코치를 충실히 따르면 골목의 전쟁은 더 격화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백 대표의 조언이 소중하고 고맙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신만큼이나 생존의 감각과 현장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나는 그게 정치인뿐 아니라 생활인들에게도 필요한 삶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바르게 살면서 동시에 잘 살고 싶지 않나.
문제는, 서생의 문제의식은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상인의 현실감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상인들이 나서기 꺼려서이기도 하겠지만, 선비를 우러르는 우리 풍토 때문인 것도 같다. 정확한 현실감각을 얻는 데에도 정확한 문제의식을 얻는 것만큼이나 오랜 연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잘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한국에 서생이 너무 많아 문제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머리 맞대고 풀어야 할 과제들이 ‘옳으냐 그르냐’의 싸움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때 특히 그렇다. 어떤 못된 서생들은 거기서 논의를 망치면서까지 제 이름을 알리고자 한다. 주자학을 오래 신봉했던 나라답다.
그런데 실은 글줄 조금 익히고 나면 마음에 어떤 형태든 잣대가 들어오고, 그 상태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는 일이 참 쉽다. 모르면 모를수록, 그런데도 인정받고 싶을수록, 옳고 그름을 붙들게 된다. 그게 ‘어떻게’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백면서생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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