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10명의 민간인 김정수가 죽었다. 김정수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고, 열두살 난 소녀이기도 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죽은 김정수와, 북한군 점령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죽은 김정수들이 있었다.
김정수나 김영수 김복수 등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럿이 죽어나갔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누군가의 처, 자녀, 또는 그저 갓난아기로 표기된 무명씨 430여명을 포함 1만4,343명의 민간인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이들은 운이 좋았다. 지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덕분에 공식 확인된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더 많은 전쟁이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사망ㆍ실종자는 국군 27만여명(사망 22만7,000여명), 민간인 76만여명(사망 37만 3,000여명)이다.
전시에 민간인 희생이 불가피하다지만 적군이 아닌 아군에 희생당한 이념살인이 문제였다. 보도연맹 학살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크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해방 직후 좌익활동을 했던 인사들을 전향시키고 국민으로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정작 가입자 다수는 좌익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었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가입했을 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잠재적 빨갱이’로 보고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소탕’했다. 이런 식의 마녀사냥으로 죽은 희생자 중엔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도 약 700명이다.(기억할 오늘: 보도연맹 학살사건)
진실화해위는 이처럼 확인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사’들을 밝히기 위해 설치됐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만이다. 5년간 1만1,175건의 신청사건을 조사해 이중 75%인 8,450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그러나 정부 기록은 물론 학계에서 추정한 희생자 수(약 100만명)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진실화해위와 유족들은 2년간 활동 연장을 요구했지만 당시 이명박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2기 진실화해위를 세우자는 주장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기 진실화해위가 끝나고 홀로 민간인 희생자 조사를 이어나간 신기철 금정굴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도 같은 생각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은 한국사회 집단 트라우마 치료”
1995년 10월 경기 고양시 금정굴에서 백골이 된 유해 153구가 발견됐다. 지역 주민들은 알았지만 쉬쉬해온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만에 북한군에 점령됐던 고양은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다시 국군에 수복됐다. 동시에 고양경찰서 주도의 부역자 색출이 시작됐다. 북한군이 아닌 이상 누가 진짜 부역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임의로 조사가 이뤄졌다. 정식 재판도 없이 수많은 사람이 금정굴에서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일제강점기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김규식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어수갑 선생도 그 중 하나다.
지난 2일 경기 고양시 금정굴평화재단에서 만난 신 소장은 “어린 시절 성장한 곳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사 진상규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에서 집단희생조사국 조사3팀장으로 일했던 그는 위원회가 끝난 뒤 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족을 만났고 2,000여명의 추가 희생자를 확인했다. 최근에는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이라는 책을 펴내고 진실화해위 당시 규명한 사망자의 명단도 모두 실었다.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위패를 모신다는 취지였다.
정부 지원도 없이 홀로 조사를 이어나가는 신 소장에게는 ‘왜 아직도 계속하느냐’는 질문이 늘 따른다. 그의 답은 “더 이상 수 많은 죽음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10년 천안함 침몰까지 수많은 죽음들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는 우리사회가 과거의 비극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했기에 이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믿는다.
한국전쟁은 너무 오래된 과거가 아닐까. 신 소장은 그 기억이 피해자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에 각인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통영ㆍ거제 지역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남편을 잃은 90대 노인을 찾아갔다. 그는 “치매를 앓아 기력도 약한 할머니가 남편 이름을 말하자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며 그날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기억했다”고 떠올렸다. ‘불려가던 날 아침으로 생선 한 마리랑 간장을 줬더니 이게 밥상이냐며 투덜거렸어요. 그러고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팍 하고 총소리가 났지요.’ 신 소장은 “남편이 아직도 보고 싶다는 게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었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슬픔을 안고 살면서도 사연을 꼭꼭 숨겼다. 오히려 정부 편에 선 보수주의자들가운데 유족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진실이 어쨌든 가족이 ‘빨갱이’란 낙인이 찍혀 죽었기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신 소장은 “정부가 분단을 명목으로 수많은 인권침해를 정당화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유족은 물론 많은 피해자들이 죄인취급 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트라우마 치료”라고 강조했다.
제 20대 국회에 제2기 진실화해위 설치를 위한 법안 6개가 발의됐다. 신 소장은 “이미 70여 년이 지난 사건들을 규명해야 하는 만큼 2기가 출범한다면 정부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공개하고 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금 남아있는 유족은 전쟁 당시 5살 미만의 어린이였던 분들이라 문헌이 중요하다”며 “나아가 정부 기록의 신뢰도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들은 조사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재판기록 자체가 조작될 가능성도 있다”는 추정이다.
신 소장은 “희생자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국정과제 3호로 천명한 문재인 정부가 새겨들을 이야기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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