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환위기 때 지원 거절했지만
G7 대표들에 적극 개입 설득해
신용도 반등하게 된 계기로
국내총생산 성장하면
1% 성장률로도 문제 없어
2050년엔 중국이 세계 경제 1위
한국과 일본은 위기이자 기회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정면에서 겪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榊原英資ㆍ76) 당시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 재무관(차관)이 지난달 27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20년 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당시 세계 외환시장 내 영향력이 워낙 커 ‘미스터 엔(円)’으로 불렸던 그는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특별초빙 교수로 영입돼 있다. 사카키바라 전 차관은 도쿄 미나토(港)구 아카사카(赤坂) 특별연구소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일본은 전후(戰後) 미군에 의해 재벌이 해체됐다”며 한국에서 여전히 재벌의 힘이 강한 점이 ‘양날의 칼’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1991년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 아니라 성숙해진 20년을 보냈다”면서 “이 단계가 되면 3~4%씩 성장할 필요가 없게 되며 한국도 곧 성숙단계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이 고정환율을 변동환율로 바꿔 환율폭락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강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2050년 중국이 세계 경제 1위, 인도가 2위, 3위가 미국이 된다”며 일본과 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라고 짚었다. 그는 한국이 외환위기 때 일본에 양자간 지원을 요청했지만 자신이 불가피하게 거절했고, 대신 주요 7개국(G7)이 지원키로 한 ‘크리스마스 이브 합의’(1997년 12월24일)를 끌어내 한국의 위기극복에 중대분기점이 됐다는 비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_한국의 외환위기를 한복판에서 지켜봤다. 한국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시 일부 재벌이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외환위기가 닥치며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재벌 재편을 포함해 김대중 정부 측의 정책이 유효했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 일본에선 미쓰비시(三菱) 등 재벌이 전후 미국 점령군에 의해 해체되지 않았느냐. 한국의 경우 재벌이 위기에 휘말려 삐끗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약점을 갖고 있다. 일본은 한국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 없다는 게 좋은 점이 됐다.”
_외환위기 때 IMF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보나.
“IMF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IMF측이 권고한 게 고정환율을 변동환율로 바꾸는 것이었다. 위기상황에 이걸 바꾸면 환율폭락 위험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태국과 한국의 환율이 폭락했다. IMF가 아시아위기를 가속시켰고 금융기관들을 폐사시킨 것이다. 반대로 IMF는 고정환율을 지키기 위해 달러를 사들여 세계시장에 공급해야 했다.”
_한국이 외환위기 초기 일본과의 양자협력을 타진했지만 불발된 것으로 안다.
“당시 IMF 지원을 요청하기 전에 IMF에 있던 한국정부와 가까운 박영철(IMF 경제조사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고 당시 금융연구원장이던 박영철 고려대 석좌교수를 지칭)씨가 나를 찾아와서 양국간 원조를 요청했다. 나는 IMF로 가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우리 입장이었다.”
_일본 정부는 왜 그런 판단을 내렸나.
“양국간 지원은 정보공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려웠다. IMF같은 국제기구가 한국에 들어가면 경제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일은 외화가 얼마 있고, 어떻게 줄어 드는지가 국가기밀이어서 일본 정부에 1대 1로 상황이 공개되기 쉽지 않았다. 대신 IMF 외에 일본을 포함한 G7이 자금공급을 약속하면서 한국의 위기가 그때부터 중요한 고비를 넘기기 시작했다. 내가 합의를 위해 각국 담당들과 긴박한 전화회담을 계속 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 때라 다들 파티로 바빠 어렵게 회담을 끌어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 대한 지원도 이때 결정됐다.”
_그 때 사카키바라 전 차관은 G7 대표들에게 한국을 어떻게 설명했나.
“미국 측 로렌스 서머스, 이탈리아 마리오 드라기, 프랑스 장클로드 트리셰 등이 경제정책 담당 책임자들이었다. 경제외교를 내가 일임했고 총리대신(하시모토 류타로ㆍ橋本龍太郞)에게 보고했다. G7이 개입해 적극적으로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의견이 정리되도록 설득했다. 자금지원 규모가 굉장히 컸고 이를 통해 한국의 신용도가 반등하는 회복의 계기가 됐다.”
_일본경제로 화제를 돌리면, 잃어버린 20년을 한국이 답습할 것이란 지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잃어버린 10년, 20년이라 말하지만 오히려 일본경제가 성숙해진 시기였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대로도 크게 문제가 없다. 일본경제는 생활수준이 높아져 무리하게 3,4%씩 성장할 필요가 없다. 물론 마이너스 성장은 좋지 않다. 조금이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일본은 1956년부터 73년까지 평균 9.8% 성장했고 90년까지 4.2%, 90년대부터 대략 1%대 성장을 했다. 고도성장, 안정성장, 성숙한 성장기를 거쳐왔고, 한국도 곧 성숙단계에 들어간다. 그러면 1% 성장이 되는 것이다.”
_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세계경제는 어떻게 변화됐나.
“글로벌화가 심화됐고 중국과 인도 경제가 강해져 아시아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아시아 시대가 지속된 결과의 성과물은 한국이나 일본도 노력하면 받을 수 있다. 2050년에는 중국이 세계경제 1위, 인도가 2위, 미국이 3위가 될 것이다. 중국 경제력이 점점 강해져 그 안에서 일본과 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위기와 기회적 요소가 동시에 있다.”
_아베노믹스는 성공한 것인가.
“지금까지는 성공했다. 아베노믹스는 금융정책이다.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가 나와 적극적인 금융완화로 성공해 엔이 싸지고 주식이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미국은 이미 금리를 올렸고 유럽중앙은행도 금융완화를 종료한다. 그런데 일본은행은 아직도 금융완화를 지키고 있다. 돈 푸는 것에 대해 슬슬 출구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오고 있다. 2~3년 안이다. 그때 아베노믹스는 큰 고비를 맞게 될 것이다.”
_한국은 젊은층의 취업이 어렵고, 일본은 취업이 돼도 임금이 안 오르는 수렁에 빠져 있다.
“글로벌화로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 물건이 만들어져 들어온다. 한일 모두 임금이 오르기 힘든 글로벌구조다. 외부적 요인은 바꿀 수 없고 국내에서 복지가 중요한데 일본은 사회복지, 연금, 의료가 모두 노인 위주다. 젊은층으로 복지를 이동해야 하고 재원확보는 유럽처럼 소비세를 20%정도 올려서라도 해야 한다.”
_세계경제의 앞날을 예측해달라.
“근대자본주의는 끝났다. 옛날처럼 산업적 의미에서 프런티어가 더 이상 없는 포화 상태다. 정보기술(IT) 같은 것은 섬유나 자동차산업처럼 일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오늘보다 좋은 내일은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도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와 이것을 유지하는 시대에 돌입했다. 지금 세계경제는 현상유지만 해도 좋은 것이다.”
도쿄=박석원 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사카키바라 전 대장성 차관은
1995년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으로 부임한 후 당시 달러당 79엔까지 치솟은 엔고 강풍을 엔 약세로 뒤집어 놓는 과정에서 일약 세계적 거물로 등장했다. 당시 뉴욕타임스(NYT)가 ‘미스터 엔’이란 별명을 붙인 게 그의 막강한 위상을 상징하는 조어가 됐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과 함께 1990년대 국제외환시장을 이끈 3인으로 꼽혔다. 1941년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태어나 도쿄대 경제학부를 나왔다. 대장성 근무 중 미국 시카고대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은 뒤 IMF에서도 4년간 있었다. 보수적인 일본 고위관료로선 매우 드물게 파격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다. 현재는 학계에서 글로벌 외환시장 동향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생산 네트워크, 인도 경제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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