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된 1997년 1월 23일 현대제철 손일만(58) 기감(생산직 최고 직급)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B열연공장을 건설 중이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현실이 된 부도는 망치로 머리를 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바닷가 허허벌판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버텼는데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난 2일 충남 당진시 송악읍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만난 손 기감에게 외환위기는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기억이었다.
7년을 통과한 ‘암흑의 터널’
손 기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9년 고향 부산의 금호산업철강에 입사하며 철강산업에 뛰어들었다. 1984년 한보철강이 금호산업철강을 인수ㆍ합병했고, 그는 1994년 당진에 새로 짓는 제철소 선발대로 파견됐다.
당진 생활 3년 만에 직면한 한보 부도는 시련의 출발이었다. 법정관리 속 대량해고로 한보철강 임직원 2,500여명 중 600명 정도만 잔류했다. A열연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B열연공장은 공정률 85%에서 건설이 중단됐다. 이후 철근공장 하나만 돌리며 뼈를 깎는 원가절감이 이어졌다.
당시 계장이었던 손 기감은 B열연공장 핵심요원으로 분류돼 회사에 남았다. 1987년 일본 고베제철에 파견돼 1년간 리비아의 미스라타제철소 건설에 참여한 경험을 인정받았지만 임금은 이전의 6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가 동네 마트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녀들은 쑥쑥 자랐는데 아파트는 32평에서 18평으로 좁아졌고 동료의 빚보증을 섰다 돈을 떼여 생활고는 깊어졌다. 손 기감은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당시는 아득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회사에 남은 건 그나마 행운이었다. 회사를 떠난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많은 동료가 주유원이나 택시 운전,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스스로 목을 맨 동료들 부고도 들렸다. 손 기감은 “한보가 국가적 위기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따가운 시선과 편견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2004년 현대자동차그룹이 한보철강을 인수하기까지 인고의 시간은 7년간 계속됐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키웠다
손 기감은 7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남들보다 어렵게 살아 그런지 내성도 있었고 언젠가는 꼭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많은 이가 그리 살았듯 그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고혈압으로 길에서 쓰러져 운명했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부산 진구 문전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팔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손 기감과 다섯 살 아래 여동생을 3년간 보살펴준 할머니도 눈길에 넘어져 다쳤고 2년간 치매를 앓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 얘기를 하던 손 기감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40년이 흘렀는데도 잊지 못하겠다”며 눈가를 훔쳤다.
희망을 버리지 않은 손 기감에게 법정관리 기간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됐다. 20대에 독학으로 영어와 일어를 공부했던 그는 ‘더 어려워질 수 있으니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일이 없어 공장이 반도 안 돌아가니 시간은 많았다. 열간압연기능사 자격증에 이어 당진제철소에서 최초로 압연기능장이 됐다. 2013년 기술자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 명장’에 오른 것도 고된 시절의 보답이다.
손 기감은 집안 사정 때문에 미뤘던 대학 진학을 고민했지만 경제적 이유로 포기했다. 그는 “나에겐 현장이 대학”이라고 말했다.
결국은 사람이다
당진공장에는 1997년의 아픔을 함께 겪은 이들이 아직 300여명 근무 중이라고 한다. 손 기감은 “현대제철이 인수한 뒤 공장이 확장돼 복귀를 원했지만 건강검진에서 탈락한 동료들이 꽤 된다”며 “열이 많은 작업현장이라 어쩔 수 없지만 안타깝다”고 했다.
현재 손 기감은 직원 120여 명을 이끌며 B열연공장의 생산을 총괄하는 기장 직책을 맡고 있다. 한 분야에 일생을 투자한 그는 “현재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육이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기술교육은 손 기감의 제2 인생 목표다. 그는 “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실제 생산에 접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며 “퇴직하면 후배들 기술교육과 중소기업 기술지원 등 철강산업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다.
손 기감은 다시 흰색 안전모를 집어 들고 대수선 공사가 한창인 B열연공장으로 향했다. 애환과 영광이 공존하는 반평생을 바친 공장이다. 회사 주인이 바뀌었어도 꿋꿋하게 지켜온 현장에서 이제는 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정년까지는 2년 남았다.
당진=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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