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듯 위기를 피해갈 수 있는 경제는 없다. 한국 경제에도 언젠가 위기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음에 닥칠 위기는 어떤 모습일까? 2008년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외생변수 때문일까, 아니면 경제 자체에 누적된 구조적 모순 탓일까?
외환위기 20주년을 맞아 경제위기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돌아본 한국일보 기획 시리즈에서, ‘미스터 원’으로 불리는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신임 손해보험협회장)은 ‘일본식 장기복합불황’을 다음 위기로 꼽았고(11월 6일자 1면), 학자ㆍ관료ㆍ금융인ㆍ기업인들은 가계부채가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가 될 것이라고 우려(11월 7일자 8면)했다.
두 목소리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사하다. 다음에 올 위기는 어느 순간 밖에서 닥칠 파고라기보단 우리 경제가 더욱 성숙하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쌓인 모순과 괴리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 대응 처방도 더 근본적이고 복합적이어야 한다.
처방1: 양극화 해소 위해 을의 목소리를 키워줘라
한국일보의 전문가ㆍ기업인 50인 설문에서 외환위기 이후 지난 20년간 가장 부정적 변화로 지목된 게 바로 ‘분배구조 왜곡과 양극화 심화’였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계층갈등이 커져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고 정책 효과도 떨어진다. 승자독식 생태계에서는 혁신 기업의 시장 진입도 어렵다. 경제적 약자가 늘면 소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전처럼 대기업 성장으로 낙수효과(고소득층과 대기업 소득이 늘면 소비ㆍ고용 효과가 확산돼 전체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하청구조에서 중소기업은 수탈의 대상이 됐다”며 “단가 후려치기나 비용 외부화를 억제하고 경영성과나 수익을 하청업체와 공유해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양극화와 함께 또 다른 양극화의 축인 가계ㆍ개인의 격차 해소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는 “토지나 주식 등 비노동 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를 검토하고, 비정규직과 재취업자를 적극적으로 돕는 노동시장 정책이 나올 때”라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극단인 미국의 대통령(버락 오바마)이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대목에서 함의를 읽을 필요도 있다. 다만 이미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 노조가 아닌, 비정규직 또는 중소기업 근로자 등 노동시장 안에서의 약자의 목소리를 더 높여주는 일이 급선무다.
양 교수는 “고용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중심이 된 새로운 노동조합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역시 “기업과 노동자 사이 힘의 불균형 문제를 노동조합을 통해 풀 수 있다”며 “강성 노조의 힘은 빼고, 보호를 못 받는 노동시장 약자들의 보호는 강화해주는 작업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방2: 망하는 기업은 망하게 하라
외환위기 과정에서 여러 대기업이 도산하면서 9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불문율이었던 대마불사(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 신화는 빛을 잃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시장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자연스러운 기업의 생로병사에도 힘을 쓰며 세금으로 민간기업을 살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박 교수는 “1997년 위기의 내부적 원인은 정부의 과도한 지원ㆍ보호 탓에 기업들이 위험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었다”며 “정부와 기업의 유착ㆍ밀착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보호 때문에 기업이 위험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기 책임하에서 위험을 회피하는 노력을 덜 하게 된다”며 “정부가 ‘옥석 고르기’ 욕심을 버리고 기업 지원ㆍ구제 절차를 금융 부문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처방 3: 부동산은 먼 타깃을 겨냥하라
전문가ㆍ기업인 50인 설문에서 다음 위기를 초래할 가장 가능성 높은 변수로 꼽힌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에 대한 처방도 필요하다.
성공적 연착륙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먼 곳을 봐야 한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정책의 타깃을 가능하면 먼 곳에 겨냥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부동산을 투기ㆍ투자의 대상에서 거주의 대상으로 인식을 전환시키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예고가 필요하다”며 “5~10년 부동산의 (가격이 아닌) 투자 가치(거래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를 차츰 떨어뜨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주택자들이 투기 목적 보유를 포기하게끔 보유세 비율을 차츰 올리는 등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시장에 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처방 4: 4차산업 주도권은 민간에 넘겨라
정부가 기업의 생멸에 개입했다가 부작용을 일으킨 교훈은 4차 산업혁명(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이 결합하는 차세대 산업구조 변화) 성장전략을 짜는 과정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산업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시콜콜 나서지 말고, 규제나 제도를 교통정리하는 지원사격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희준 연세대 교수는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여전히 정부 주도로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며 “정부가 그림을 그리면 민간이 따라간다는 식의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의 신기술이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기존 규제에 막히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며 “정부는 이런 규제를 정비해 투자가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면 된다”고 말했다.
처방 5: 통상은 종합예술이다
미국과 중국의 자국중심주의에서 비롯될 바깥의 파고를 막을 방파제도 필요하다. 바로 세밀한 통상정책이다.
이시욱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지금 통상의 위기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개인 때문이 아니라 국제ㆍ미국 경제의 여건 변화에서 비롯된 시대의 산물”이라고 단언했다. 이 교수는 “그럼에도 한국 통상정책은 ‘통상=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2000년대 초반 공식에 얽매여 있다”며 “통상은 무역, 직접투자, 이민, 경제협력, 산업정책, 일자리 등이 종합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통상정책의 목표ㆍ수단ㆍ방향을 한꺼번에 수립하는 미국의 사례처럼 한국도 거시정책 일환으로 통상정책 방향성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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