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서 자주 호출되는 인물은 한나 아렌트입니다. 보수정권 9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계속 되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사람들 밑에서, 왜 그런 일들을, 그렇게 열심히들 했을까. 조직의 일원으로 먹고 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했다면, 앞에서는 ‘충성’ 외친 뒤 뒤돌아 서서 적당히 하고 말았어도 될 일들이었는데 말입니다.
가끔 적폐청산 수사대상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이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주장할 때면 측은해지기도 합니다. 언제나처럼 애국에 대한 확신이야 말로 양심에 대한 마취제로는 최고니까요.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자꾸 불려 나오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억울하다” “난 그게 애국이라 생각했다”는 류의 ‘악의 평범성’, ‘악의 진부함’에 대한 고민을 먼저, 아주 깊게 했으니까요.
정치철학자로서 아렌트의 대표적 저작을 꼽으라면 많은 전문가들이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보다는 ‘인간의 조건’을 꼽습니다. 그저 오늘도 처리해야 할 일거리 하나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동물적 노동’의 사고방식이 현대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으며, 공공성에 대한 고민을 거듭할 때 ‘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교적 초기 저작임에도 ‘인간의 조건’은 이후 이어지는 아렌트 사상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 받습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현대사상가들을 재조명한 ‘세상을 뒤흔든 사상’(메디치)에서 아렌트를 다루면서 ‘인간의 조건’을 분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은 일본의 아렌트 전문가인 나카마사 마사키 가나자와대학 교수가 바로 그 ‘인간의 조건’을 6차례의 대중강연을 통해 또박또박 읽어나간 기록입니다. 출판사 아르테가 기획한, 인문고전 한 권을 선정해 말 그대로 강독하듯 한 장 한 장씩 읽어 나가보자는 기획물 ‘렉쳐+텍스트’의 첫 번째 책입니다. 영어본이 아니라 독일어본을 염두에 둔 강독이니, 그것도 세밀함을 중시하는 일본 학자의 강독이니 내용은 상상에 맡깁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나카마사 교수가 후기에다 써놓은, 세계적으로 아렌트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 개봉한 영화 ‘한나 아렌트’ 관람기입니다. 나카마사 교수는 아렌트뿐 아니라 등장인물 전부가 공적 자리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웅변하듯 제 주장을 또박또박 펼치는 게 영 못마땅합니다. “사상가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닐까.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언어를 찾지 못해 번민하고, 언어화하고 나면 그것대로 무언가 빠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욱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사상가 아닐까.” 번민과 안절부절 없이 웅변하듯 단호하게 ‘애국’을 외치는 자들의 애국이란, 동물적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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