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첫 상품화 전국에 유통
유기농 배추 위생적 생산 입소문
올해 104만 상자 312억 매출 예상
괴산군 예산 7% 이르는 효자상품
가격 치솟는 금배추 시기에도
일정 가격 유지해 소비자 신뢰
절임배추의 등장으로 김장이 한결 쉬워졌다. 택배로 받은 절임배추에 양념만 버무리면 되는 간편함 덕에 도심 아파트에서도 손쉽게 김장을 담글 수 있게 됐다. 도시 주부들이 절임배추를 ‘김장의 혁명’으로까지 부르는 이유다.
매년 김장철만 되면 이 절임배추 때문에 지역 전체가 들썩이는 곳이 있다. 절임배추의 본고장이라고 자부하는 충북 괴산군 얘기다.
괴산군은 절임배추를 가장 먼저 상품화하고 전국에 유통한 곳이다. 이 지역 농가들은 최고 품질의 배추를 생산하고도 널을 뛰는 가격 때문에 안정된 소득을 올리지 못하자 고민에 빠졌다. 1990년대 들어 일부 농가가 적정한 배추 값을 받으면서 부가가치를 높일 요량으로 절임배추를 만들어 도시민에게 직접 공급하는 안을 궁리해냈다. 마침 맞벌이 부부와 1인 가구 증가로 간편한 김장에 대한 욕구가 커지던 터였다.
한 두 해 지인들을 통해 절임배추를 출하해보니 반응이 좋았다. 자신감을 얻은 농가들은 1996년 아예 절임배추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한 뒤 ‘괴산시골절임배추’란 상표로 전국 판매에 나섰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후 절임배추 생산지가 괴산군 전역으로 퍼졌고, 괴산군은 특수시책으로 절임배추를 지역특산물로 키우기 시작했다.
8일 괴산군 문광면 G영농조합법인의 절임배추 생산 공장.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위생복을 입은 직원들이 소금에 절인 배추를 세척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천연암반수로 세척한 배추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고재분(65)씨는 “기온이 뚝 떨어진 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본격적인 김장철엔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이곳의 절임배추는 거의 전 자동시스템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대형 절임통에서 24시간 소금에 절인 배추는 컨베이어를 거쳐 세척실로 넘어간 뒤 공기방울 자동세척기로 2차에 걸쳐 세척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람의 손을 거쳐 세척한 배추는 금속검출기로 이물질 잔존 여부를 확인한 뒤 포장에 들어간다.
이 영농조합법인 손기용(55)대표는 “해썹(HACCP)인증을 받은 시설을 갖추고 하루 최대 1,000상자(20㎏들이)를 생산한다”며 “고소한 유기농 배추를 위생적으로 생산한다는 소문이 난 덕에 올해 물량도 이미 예약을 마친 상태”라고 말했다.
괴산 절임배추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지역을 상징하는 특산물로 자리매김했다.
괴산군에 따르면 올해 660개 배추 농가가 482ha에서 104만 상자(상자당 배추 8~9포기)를 생산해 312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같은 매출액은 올 한해 괴산군 예산(4,500억원)의 7% 수준에 이르는 규모다. 절임배추는 소득이 높은 효자 품목이다. 10a당 평균 소득액이 647만원으로 다른 품목에 비해 월등히 높다.
괴산 절임배추가 명품으로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 배추가 맛이 좋고 김장용으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괴산은 토양에 석회질이 많아 배추의 노란 속잎이 알차고 단단해 김장용으로 제격이다. 재배ㆍ수확 시기가 김장철과 잘 맞아 떨어진다. 게다가 밤낮의 기온차가 큰 준고랭지에서 자라 배춧잎이 아삭아삭하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좋은 소금을 쓰는 건 기본이다. 괴산 농가들은 국내산 천일염으로만 배추를 절인다. 농가들은 2012년 전남 신안 도초농협과 천일염 공급 계약을 맺고 최고의 천일염을 우선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농가들은 이 천일염을 1년간 저장해 간수를 쏙 뺀 뒤 배추에 뿌린다. 천일염이 지닌 쓴맛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안정된 가격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쌓은 것도 괴산 절임배추가 롱런하는 이유다.
괴산 농가들은 김장용 배추를 수확하기 한달 전인 9월 말쯤 절임배추 공급 가격을 미리 정한다. 그리고 한 번 결정한 가격은 모든 농가가 철저히 지킨다. 과열 경쟁과 품질 저하를 막기 위해 일종의 가격고시제를 자체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배추 수급 상황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잦지만, 괴산 절임배추는 작황에 상관없이 10여 년째 일정한 가격(1상자당 2만 5,000원~3만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2010년 배추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금배추’로까지 불렸던 때에도 괴산 농민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세의 반에 반도 안 되는 값에 절임배추를 판매한 적이 있다.
최한균 괴산군 유통가공팀장은 “우리 농가들은 소비자와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자기만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며 “판매처가 확실한 만큼 농가 소득도 안정적으로 보장된다”고 귀띔했다.
괴산 절임배추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농가들은 ‘자연한포기’란 공동 브랜드를 만든 데 이어 현대화된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있다. 괴산군은 좋은 소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5,000톤 규모의 소금창고를 건립했다. 또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절임배추의 품종을 통일하고 배추 크기를 표준화·규격화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나용찬 괴산군수는 “괴산 절임배추는 맛과 품질이 뛰어난 배추의 부가가치를 높일 방안을 스스로 만들어 낸 농가들이 우직한 농심으로 도시 소비자와 신뢰를 쌓아 지역의 대표 특산물로 띄운 사례”라며 “해외 수출도 본격화하겠다”고 말했다.
괴산=글ㆍ사진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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