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뇌 과학자 존 메디나 박사가 자주 듣는 질문. “아이를 하버드대학에 보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메디나 박사가 늘 내놓는 답. “집에 가서 배우자에게 잘해 주세요.”
동문서답 같은 대화에 행복의 열쇠가 있다. 바로 ‘애착’. 심리학에선 ‘양육자 또는 타인과 안전하고 강력한 감정적 유대를 맺는 것’으로 정의한다. 아이가 화목한 가정에서 지내며 애착을 튼튼하게 형성해야 뇌도 마음도 잘 자란다는 것이 메디나 박사의 메시지다. 대학 간판만 달린 게 아니다. 자존감, 회복탄력성, 폭력 성향, 알코올 소비량, 흡연율, 이혼 가능성, 심장병 발병 확률… 모두 애착이 좌우한다. 애착은 결국 ‘마음의 근육’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 나라도 나를 사랑하자”는 구호가 넘치는 건 우리가 애착에 목마르다는 뜻이다. 애착 연구 권위자들의 조언을 들어 보자. 세계 최고 애착 연구기관인 영국 존 볼비 센터의 마크 라이닝턴 대표와 최성애 HD행복연구소 소장. 두 사람은 최근 서울 평창동 HD행복연구소에서 대담을 벌였다. 최 소장은 애착 양육을 다룬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남편인 조벽 숙명여대 석좌교수와 공저ㆍ해냄)를 곧 펴낸다.
-상처받은 ‘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기계발서가 쏟아져 나옵니다. 도움 될까요.
라이닝턴 박사(라이닝턴)=“영어로는 ‘Self-help(스스로 돕다) 또는 Self-healing(스스로 치유하다) Book(책)’이라 하죠. 용어 자체가 모순이에요. 사람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존재예요. 책을 읽는 것으로 마음의 병을 고칠 순 없어요. 아주 잠시 자기 위안을 얻을 뿐이에요.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겐 책이 통하죠. 책을 읽으면서 성공적이었던 애착 경험을 복기해 스트레스를 견뎌요. 자신감도 얻죠. 다른 사람과 함께 읽으면 혼자 읽을 때보다 효과가 더 커지고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마음이 건강하지 않다는 건 관계의 문제니까요. 타인과의 관계가 편안하지 않아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문제는 애착 손상이 심해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일수록 관계 자체를 두려워해 손을 내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최성애 박사(최)=“자기계발서가 위험한 이유는 또 있어요. 과도한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확신을 심어 준다는 겁니다. 그건 관계를 망치는 독이에요. 사이코패스의 특징 두 가지가 뭘까요. 공감능력 결여와 나르시시즘이에요.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연쇄살인범만 떠올리지만, 심리학에는 ‘기능적 사이코패스’라는 개념도 있어요. 유능하지만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죠. 아이들을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양육 방식도 위험해요. 아이가 시험을 잘 보면 ‘우리 아들이 천재구나’, 아이가 낙서를 하면 ‘피카소가 환생했구나’,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하면 ‘제2의 김연아가 되겠구나’ 하는 부모들이 있어요. 아이를 위태로운 자기 도취에 빠뜨려요. ‘참 잘했구나’ 정도의 칭찬이 적당해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애착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순 없나요.
라이닝턴=“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관계를 맺고 유지합니다. SNS에선 상대의 정보나 표정이 제한적으로 전달돼요. 서로 감정을 오해하거나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에요. 마음이 건강하다면 오해나 충돌을 금세 바로잡고 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위험 부담이 큽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더 취약할 수밖에 없어요. 어렵게 감정을 드러냈는데 거부당하거나 놀림받으면 엄청난 상처를 받아요. 상처를 쉽게 씻지도 못하고요. 저는 상담자들과 휴대폰으로 연락할 때도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합니다.”
최=“SNS 공간의 관계는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착각에 불과해요. 진짜 관계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삭제해 편리하다고 느끼지만, 텅 빈 관계죠. 사이버 테러를 당할 위험도 있고요.”
-사랑은 피하고 ‘썸’만 타거나,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느는 건 사회경제적 현상입니다. 애착과도 관계 있나요.
라이닝턴=“영국에도 그런 현상이 있어요. 양육자의 성향이나 불안한 가정 환경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는 걸 학습하며 자란 사람들이죠. 감정이 많이 소요되는 성적 관계, 사랑 자체를 회피하는 겁니다.”
최=“부모를 비롯한 양육자가 아이를 방치하며 키우는 게 그래서 위험해요. 스킨십이나 감정으로 타인과 엮이는 게 부자연스럽고 귀찮다고 여기게 돼요. 결혼생활도 평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요. 폭력, 외도, 중독 같은 문제가 없는데도 불행한 부부가 많아요. 상대를 밀어 내려 하는 배우자 때문이죠. 애착은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달려와 주고 내 편이 돼 줄 것이라는 믿음이에요. 그 믿음이 반복적으로 배반당하는 절망은 우리 몸에 새겨집니다. 아이는 양육자가 자기 마음을 다 알고 돌봐 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양육자가 기대를 저버리면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 느끼죠. 영유아기의 그런 스트레스는 뇌 구조 자체를 바꿉니다.”
-애착 문제를 겪는 사람이 느는 이유는 뭔가요.
최=“정부가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를 엉뚱하게 풀려 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낳기만 하라. 국가가 키워 주겠다’는 정책이 문제입니다. 만 2세까지는 아빠든, 엄마든, 다른 누구든, 주 양육자들과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때 쌓은 애착 자산이 평생을 가죠. 제가 ‘정서적 금수저’라고 부르는 개념이에요. 무턱대고 보육 시설에 맡기면 ‘정서적 흙수저’가 될 가능성이 커져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출산 강제 정책이 나쁜 선례죠. 비출산과 낙태를 처벌한 결과,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나 처참하게 방치됐어요. 결국 나라 전체가 불행해졌죠.”
라이닝턴=“국가 주도의 양육 정책은 당장 출산율을 높여 경제에 기여할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막대한 손실을 끼칠 겁니다. 애착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술, 담배 등에 중독되거나 심장병 같은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많아요. 결국 사회적 비용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얘기죠.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정부는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해 시골로 보냈어요. 폭격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아이와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그런 역사적 아픔이 있는데도 영국 부유층은 여전히 아이를 명문 기숙학교에 보내요. 그렇게 자란 아이들의 상처는 대학교 이후에 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경우 아이의 트라우마만 걱정하지만, 부부의 몸과 마음도 다칩니다.”
-맞벌이 부부나 한 부모ㆍ조손 가정에선 애착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건가요.
최=“꼭 그렇진 않아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양육자가 어머니와 새아버지에서 외조부모로, 거주지가 미국에서 인도네시아 등으로 바뀌었지만 훌륭하게 자랐죠. 단 한 명의 양육자라도 충분한 사랑을 주면 아이는 망가지지 않아요. 아이가 언제나 최우선순위라는 걸 느끼게 해 줘야 해요. 제 아버지는 제가 방에 들어가면 읽던 책을 덮으셨어요. 그런 태도가 최고의 옷이나 학원보다 소중해요. 맞벌이 부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경력 단절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부부가 경력 쌓는 기간을 조절하고 양보하는 걸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세요. 길게 보면 경력을 이어 가는 게 중요하니까요. 특히 아버지는 육아에 있어 ‘아부지(我不知ㆍ나는 모른다)’가 되면 안됩니다. 정부와 기업의 정책적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고요.”
라이닝턴=“젊은 미숙련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보육을 담당하는 건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정부가 보육 교사를 제대로 훈련해야 합니다. 보육 시설에 아이를 맡겨야 한다면, 좋은 시설인지 꼼꼼히 점검하세요. 공부나 배변 훈련 같은 학습을 강조하는 시설,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야 한다고 가르치는 시설, 지나치게 깔끔하고 화려한 시설은 위험합니다.”
-애착 손상은 복구할 수 없나요?
라이닝턴=“만 2세까지가 애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니에요. 그 시기를 놓쳤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애착은 평생에 걸쳐 구축하고 관리해야 하는 숙제입니다. 16세인 제 아들이 대학 입학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8세 때 즐겨 먹던 음식, 즐겨 하던 컴퓨터게임에 빠진 적이 있어요. 그럴 때 부모가 ‘너는 다 컸으니까 알아서 잘 해야지’라고 닦달하면 안 돼요. 어릴 때처럼 다시 따뜻한 애착을 경험하게 해 줘야 합니다. 인생은 직선으로 쭉 가는 게 아니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최=“뇌도, 사람도 죽을 때까지 변한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요. 애착 문제를 겪는 사람은 수치심, 심하면 자학적 혐오로 괴로워합니다. 부모 등을 미워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부모도 무지했거나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 그랬을 테니까요. 애착 관계는 약 75%가 대물림됩니다. 단, 애착 손상을 예방하면 개인과 사회의 비용이 훨씬 덜 든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현지호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영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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