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은 털끝 만큼의 차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늘과 땅 만큼 격차가 생긴다는 뜻이다. 나비효과와 비슷한 맥락이다. 따지고 들면 세상에 무관한 것은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작은 변화와 움직임이 누군가에게 예상치 못한 큰 결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다. 일상에서 ‘천지현격’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연약한 섬들, 학술용어로 군소도서개발국(Small Island Developing States, SIDS)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섬은 유토피아의 원형으로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2004년 개봉한 ‘콜래트럴’이라는 영화에는 맥스라는 이름의 택시 운전기사가 주연으로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의 하층민인 그는 수입(현찰)이나 보험증서 같은 중요한 것을 끼워두는 파우치에 섬 사진 한 장을 꽂아두고 수시로 섬을 꿈꾼다. 그 사진을 보며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고, 피로가 몰려올 때면 수 초 동안 그 섬을 바라보며 다시 힘을 얻는다. 위험하고 지저분한 뉴욕의 택시기사로 살아가는 맥스에게 섬 사진 한 장은 지친 하루의 위안이자 인생의 목표다.
아틀란티스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회자된 전설 속의 섬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지상낙원이었지만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에 분노한 신이 기원전 9500년 경 대지진과 홍수로 저주를 내려 하루 만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아틀란티스는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큰 대륙이나 다름없는 섬이며, 아름답고 신비한 과일이 나고 온갖 귀금속을 만드는 지하자원이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신화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선술과 천체관측술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틀란티스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15~18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린 거다. 섬 하나가 역사를 흐름을 바꾼 셈이다.
섬은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보물섬 등 문학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로도 쓰였다. 홍길동전의 율도국, 허생전의 무인도 개척, 제주도의 이어도 신화 등 한국문학에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이 섬들 역시 대부분 '꿈'의 무대로 그려진다. 섬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완벽한 사회, 즉 이상향이다.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외로움과 더위, 굶주림과 다투며 선원들을 버티게 하는 힘도 바로 섬에 대한 꿈, 꿈 속의 섬이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섬은 억울하고 비참한 삶의 터전이다. 군소도서개발국(이하 군도국)은 작은 규모 때문에 태생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문제들에 대응하며 발전을 이루려 애쓰는 개미군단 같은 섬들이다. 카리브해ㆍ태평양ㆍ인도양ㆍ중국해ㆍ북극해에 걸쳐 52개의 군도국이 있고, 이 중 38개 섬은 UN회원국이다. 이들 군도국은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강대국들의 횡포에도 주목 받지 못한다. 쓰나미, 화산,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등 환경 재앙은 직접적 위협이다. 값비싼 통신과 에너지 비용,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무역, 부패한 정치도 군도국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다.
사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제한된 공간에서 협소한 토지와 해양자원을 활용해 삶을 영위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섬은 대륙에 대한 의존성을 버릴 수가 없다. 동시에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보물창고 같은 섬을 사랑하고 동경한다. 대륙이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 때문에 몰디브, 타히티, 피지, 모리셔스, 사모아 등은 언제나 인기 허니문 여행지다. 군도국의 가장 큰 수입원이 관광산업인 것은 당연하다.
군도국은 레게, 맘보, 칼립소, 푼타, 단손 등 다양한 음악의 발생지이다. 밥 말리, 오마라 포르투온도, 콤파이 세군도 등 유명 음악가도 군도국 출신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섬에서 보낸 작가들도 적지 않다. 서머싯 몸은 타히티를 배경으로 소설 ‘달과 6펜스’ 를 썼고, 사모아에서 영감을 받아 단편소설 ‘레드’를 썼다. 조슈아 로건 감독은 고전 뮤지컬 ‘남태평양(South Pacific)’의 모티프를 사모아에서 얻었다고 한다. ‘지킬 앤드 하이드’, ‘보물섬’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도 생의 마지막 6년을 사모아에서 보냈다.
사실 전세계를 먹여 살리는 것은 땅이 아닌 바다다. 인구의 60%가 바다생태에 의존해 살고 있다. 에너지를 만들어 내거나 신체를 구성하는 미네랄의 80%는 바다에서 나온다. 지구 면적의 71%,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인 걸 보면 섬 역시 바다만큼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실수는 바다와 섬 사람들을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 기름유출로 바다를 더럽히고, 온난화로 빙하를 녹여 섬을 가라 앉히고, 환경오염으로 열대어와 산호군락이 가득했던 섬을 졸지에 쓰레기 섬으로 둔갑시킨다. ‘나 하나쯤’ 혹은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 어때’라고 생각하는 무심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억울하게도 고스란히 이들 군도국에 돌아간다.
남태평양의 키리바시 섬은 50년 안에 가라 앉을 것으로 예상돼 긴급히 수도를 피지로 옮기고 있다. 투발루 주민들은 졸지에 '기후난민'이 되어 떠도는 처지다. 2050년경이면 일부 어족은 완전히 멸종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 중에는 상어, 대구, 황새치, 넙치같이 익숙한 이름의 물고기도 포함된다. 30만 마리의 고래와 돌고래들이 매년 죽어간다. 어족을 보호하는데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지만, 그마저도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잘 실감나지 않는다. 며칠 전만 해도 온풍이 불었는데, 별다른 징후도 없이 갑자기 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당신은 가을인가? 조용하게 왔다가 좋아지니 가네’라는 재미난 문구를 읽었다.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자연의 순환이 깨지고 생태계 사슬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도 원상복구가 힘들다. 환경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모두가 겸손해져야 한다.
박재아 여행큐레이터 DaisyParkKorea@gmail.comㆍ사진제공 남태평양관광기구(SPT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