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옌볜 흑룡파 위성락 되려
촬영 직전 삭발하며 연기 준비
“진짜 재중동포 아니냐” 호평
10년 넘게 연극 대학로선 유명
영화ㆍTV도 숱하게 단역 출연
“멜로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그는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당연한 보답”이라고 했다. ‘진심’과 ‘노력’이란 말이 가치를 잃은 시대이기에, 그에게 주어진 ‘기적’과 ‘보답’은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지만 배우 진선규(40)를 향한 환호는 식을 줄 모른다. 그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 붙박이다. 진선규는 청룡영화상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정한 남우조연상(‘범죄도시’) 수상자다. “내가 뭐에 씐 건가 싶어요. 꿈꾸는 것도 같고요. 이러다 큰일 날까 덜컥 두렵기까지 해요.”
친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콧날 세워 주겠다면서 곗돈 붓고 있는 고향 친구들을 떠올리며 눈물 훔치던 진선규의 수상 소감은 ‘황정민의 밥상 소감’만큼이나 오래오래 회자될 것이다. 그는 “지인들이 보내 준 시상식 영상을 쑥스러워서 못 봤다”고 했다. 대신 고마운 마음을 문자메시지에 담아 보내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기쁘다는 표현을 고맙다는 말로 대신하던 그가 유일하게 속내를 보이던 순간은 이 말을 할 때였다. “트로피가 꽤 무겁지만, 들 만했습니다.”
진선규의 수상을 예감하고 약속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세상이 달라졌다. 28일 한국일보에 진선규가 찾아오자 편집국도 들썩였다.
연기 인생 터닝포인트 ‘범죄도시’
‘범죄도시’에서 진선규는 중국 옌볜 흑룡파 보스 장첸(윤계상)의 오른팔 위성락을 연기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움푹 패인 얼굴과 살벌한 눈빛. 쳐다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아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관객들은 “진짜 재중동포 아니냐”고도, “혹시 조폭 출신 배우를 데려왔냐”고도 했다. 그런데 마주 앉은 진선규는 아이처럼 선량한 인상이다. 목소리도 포근하다. 그래서 처음엔 ‘범죄도시’ 오디션에서 낙방했다고 한다. 스태프들이 더 안타까워하며 ‘한번 더 만나 보라’고 감독을 설득했고, ‘대체 어떤 배우이길래’ 하며 의아해한 감독은 진선규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제가 상업영화에서 처음으로 이름 있는 역할을 받은 작품이 ‘사냥’이에요. 그때 알게 된 분들이 다른 오디션을 소개해 주고, 그렇게 인연이 이어져서 ‘범죄도시’까지 오게 됐어요. 제가 큰 복을 받은 것 같아요.”
‘장첸파’로 뭉친 윤계상과 진선규, 양태 역의 김성규는 크랭크인 한 달 반 전부터 모였다. 옌볜어를 배우다, 대사 호흡을 맞췄고, 나중엔 액션과 동선까지 익혔다. 세 배우의 아이디어로 시나리오 속 장면들이 새롭게 재구성됐다. “(윤)계상이가 장첸의 몫을 나눠 줬어요. 위성락과 양태의 장면 중에 애초 장첸의 것이었던 게 많아요. 수십번 리허설을 하면서 연기를 준비했어요. 장첸파의 삼각 구도가 자리 잡히니까 엄청난 힘이 생기더라고요. 계상이의 똑똑한 한 수가 제대로 통한 거죠.”
진선규의 ‘한 수’는 삭발이었다. 촬영은 다가오는데 위성락 이미지가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긴 머리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밀었다. 그 뒤에 위성락의 의상을 입어 봤다. 몸에 착 달라붙었다. 혹시라도 캐스팅이 무산될까 불안하던 마음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진선규는 “배우가 어떻게든 관객을 끌고 갈 수 있는 연극과 달리, 영화에서는 아예 그 인물로 보여야 한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고 했다. 온전히 위성락이 돼 버린 진선규는 스크린을 장악했다. 뜻밖의 ‘부작용’이 생겼을 정도로 강렬했다. “머리가 길면 사람들이 얼굴을 못 알아보더라고요. 하하.”
진선규로 인해 충무로에서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인지도는 낮아도 연기력은 뛰어난 배우들이 분명 지금보다는 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진선규도 “‘범죄도시’에 그런 배우들이 유독 많았다”며 “이 영화가 좋은 선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서 10여년 담금질…영화는 새로운 시작
‘범죄도시’로 진선규를 알게 된 관객들은 그의 이전 출연작 목록을 찾아보다가 깜짝 놀라곤 한다. 작품이 많아서 놀라고, 겹치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또 놀란다. ‘남한산성’에선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죽음을 맞은 초관 이두갑이었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선 한재호(설경구)를 괴롭힌 교도소 보안계장이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김명민)과 최후를 함께한 혁명 동지 남은과, ‘닥터스’에서 의료사고의 단서를 갖고 있던 의사 김치현, tvN ‘안투라지’의 영화사 투자팀장, MBC 드라마 ‘여자를 울려’에서 고난을 겪는 정덕인(김정은)을 응원하던 시아주버니 황경수도 그가 연기한 인물들이다. 진선규는 “뒤늦게 이전 출연작이 거론되면서 위성락 연기에 대한 평가가 더 좋아진 것 같다”고 겸손 담긴 농담을 던졌다.
카메라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명 배우는 아니다. 대학로에선 손에 꼽히는 유명 배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하고 2004년 ‘공연배달 서비스 간다’라는 극단을 결성해 10년 넘게 연극에 매진했다. 연극 ‘칠수와 만수’ ‘늘근도둑 이야기’ ‘올모스트 메인’ ‘거기’ ‘뜨거운 여름’,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난쟁이들’ 등 유명 무대에 주인공으로 섰다. 특히 몸을 이용한 표현에 뛰어나, 2002년 퍼포먼스 뮤지컬 ‘델라구아다’ 내한 공연 때는 브로드웨이 팀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여느 연극 배우들처럼 그의 생활도 여유롭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 고생스럽게 느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연기하는 게 좋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게 좋고, 그러다 보면 좋은 공연이 완성돼 있고, 공연을 무대에 잘 올려서 다음 공연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고… 그렇게 10년이 흘렀어요. 힘들다고 생각했으면 못 했을 거예요.”
경남 진해(현 창원시)에서 자란 진선규는 체육 교사를 꿈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따라 놀러 갔던 극단에서 배우라는 꿈을 얻었다. 어머니가 빌려서 마련해 준 대학 입학금 120만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다. 막내 외삼촌의 친구 집, 육촌 형수 집, 대학 선배 집 등에 얹혀 살며 학교를 다녔다. 짐가방 3개가 당시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인정받는 배우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소박하다. “오디션을 안 보고 감독님을 만나 캐릭터 얘기를 나누는 것”이란다. 욕심을 더 내라고 채근하니 “멜로 연기도 해보고 싶다”는, 역시나 소박한 답이 돌아왔다. 왜 모두가 진선규를 좋아하고 응원하는지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진선규를 위해 곗돈 붓는다던 고향 친구들 소식을 물었다. “아주 난리가 났대요. 이름이 방송을 타서, 이제 어디 가서 함부로 침도 못 뱉겠다고 하더라고요. 상 받았으면 코 생김새도 인정받은 것이니, 곗돈으로 가족들과 고기 사먹으라고 얘기했습니다. 하하.”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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