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선주민(Native American, 인디언) 정책 기조는 동화와 보존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선주민 입장에서 동화(assimilation)란 멸절(extermination)이고 보존(conservation)은 자치(self-determination)였다.
남북전쟁 영웅이었고 대평원 인디언 학살의 지휘자였던 미 육군 원수 필립 셰리든(1831~1888)은 “내가 아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란 요지의 말을 했고, 26대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1886년 뉴욕 연설에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열에 아홉은 정말 그렇다. 나머지 한 명도 썩 알고 지내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가장 사악한 카우보이도 평균적인 인디언보다는 윤리적”이라고도 했다.
루스벨트가 저 말을 하던 무렵 대륙 인디언 10명 중 9.75명이 학살과 전투, 전염병, 강제이주, 굶주림 등으로 이미 ‘멸절’된 뒤였다.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15세기말 1,500만 명에 이르던 북미 인디언은 1890년 25만 명에 불과했다.(‘제노사이드’ 최호근, 책세상) 1890년은 사우스다코다 주 파인리지의 ‘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이 있었던 해다. 백인 기병대의 마지막 인디언 집단 살해(선주민 저항) 사건이었다.
반전ㆍ인권운동이 절정이던 1970년 출간된 작가 디 브라운(Dee Brown)의 중ㆍ서부 인디언 멸망사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는 잊히다시피 한 저 사건과, 영화로 알던 잔혹한 인디언, 백인 북미 개척사를 새롭게 보게 한 계기였다.
직후인 73년 2월, 200여 명의 무장 인디언(라코타 수족)이 상징적 참극의 땅 ‘운디드니’를 다시 점거했다. 언론의 주목과 우호적인 여론 덕에 그들은 경찰 및 주방위군과 무려 71일을 대치했고, 진압 과정에 인디언 두 명이 숨지고 방위군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은 당시 인디언 족장(Dick Wilson)이 사병조직까지 거느린 채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데도 주 정부가 그를 비호하면서 비롯됐지만, 바탕에는 그들의 열악한 처지와 백인 정부의 위선에 대한 해묵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저 사건을 주도한 게 ‘미국인디언운동’(AIMㆍAmerican Indian Movement)이었다. 흑인 무장 조직 ‘블랙 팬서스(흑표당)’를 본받아 1968년 결성된 AIM은 백인 정부와의 협상은 구걸과 다를 바 없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옛 평원 전사들처럼 총을 들기도 해야 한다고 여기던 전투적 인디언단체였다. 그들은 69~71년의 알카트래즈 점거와 추수감사절의 ‘인디언 추모의 날’ 선언(70),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의 메이플라워호 복제선 점거, 러시모어 산 대통령 조각상 점거, 워싱턴DC 인디언사무국(BIA) 점거 및 부족 주권 요구 20항 선언(72) 등으로 ‘명성’을 떨쳐가던 때였다. 그들은 과거와 달리 자신들의 전선(戰線)이 평원이 아니라 여론과 매스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AIM의 비타협적인 폭력 노선은 인디언사회 안에서도 적잖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70년대 린든 존슨 이후 미국 정부가 선주민 말살ㆍ동화 정책을 포기하고 부족 자치 및 지원 정책으로 선회토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도 AIM이었다. AIM은 강제이주 시절의 ‘눈물의 트레일’을 따라 걷는 ‘기나긴 행진 The Longest Walk’ 등 행사를 통해 인디언 처우와 권리를 이슈화하며 지금도 건재하다.
AIM을 창설하고 저 굵직굵직한 사건 대부분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가, 동갑내기 인디언 데니스 뱅크스(Dennis Banks)와 러셀 민스(Russel Means, 1939~2012)였다. 미국 언론이 “시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 이후 가장 유명한 인디언”이라고 불렀던 20세기 인디언 전사 데니스 뱅크스가 10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뱅크스는 1937년 4월 12일 미네소타 주 리치레이크(Leech Lake)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노와 쿠믹(Nowa cumig, 우주의 중심)’이란 이름을 얻어 태어났다. 그는 5살에 부족 품에서 떨어져 백인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긴 머리를 깎고, 부족 언어 대신 영어로 말하고, 성경을 읽고, 백인 옷을 입고, 빵과 소시지를 먹고, 병영처럼 자고 기상하며, 하루하루 백인 아이로 바뀌어 가야 했다. 훗날 그는 자서전(‘Ojibwa Warrior’, 2004)에서 그 시절을 “나를 비롯한 모든 인디언 아이들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나날일 것”이라고 썼다.(WP, 2017.10.31)
미국의 인디언 자녀 기숙학교 교육은 호주 정부가 65년간 자행했던 ‘원주민 인종세탁’이나 지난 달 24일 쥐스탱 프뤼도 캐나다 총리가 공식 사죄한 원주민 아동 강제 동화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 정책은 루스벨트가 말한 ‘나머지 한 명’의 순종적인 인디언마저 백인화하려던 대표적인 방편이었다. 18세기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기숙학교 교육은 19세기 말 인디언사무국(BIA) 지원 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미 육군 대령 출신 리처드 프랫(Richard Pratt)이 1879년 펜실베이니아에 세운 인디언 기숙학교의 모토는 “인디언을 사람 만들자(Kill the Indian, Save the Man)”였다. 물론 그 교육에 잘 적응해 목사나 의사 교육자가 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디언도 아니고 백인도 못 된 다수는 부족 공동체에서 외면 당하고 백인의 도시에서도 환대 받지 못하는 존재로 방황했다. 뱅크스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툭하면 학교에서 도망치고 다시 끌려가곤 하던 끝에 17세에 보호구역으로 귀향했지만, 그에겐 일거리도 자립 능력도 없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던 인디언들의 친목단체 ‘미국인디언협회(1911)’의 요구와 1차대전 참전 인디언들에 대한 보상책으로 미 의회는 1924년 인디언 시민권법을 제정했다. 인디언 사회의 문제점을 밝힌 미 의회 조사보고서 ‘메리엄 보고서(The Problem of Indian Administration)’가 나온 것도 1928년이었다. 미국 정부는 1887년의 ‘토지할당법(General Allotment Act)으로 부족 공동토지를 분할해 개인에게 불하함으로써 공동체를 와해하고(명분은 자립농 육성) 연방 지원을 삭감했던 정책을 포기하고, 부족 자치정부 재건을 위한 인디언재조직법(Indian Reorganation Act, 1934)을 제정했다. 자치 주권과 의료 등 복지 지원이 강화됐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조가 표변했다. 매카시즘의 반공주의는 ‘비 미국적인(Un-American’ 것들에 대한 병적인 결백주의의 일부였고, 인디언은 존재 자체가 비미국적인 것이었다. 의회와 정부는 46년 인디언분쟁조정위원회(Indian Claims Commission) 등을 만들어 개별 부족이 누리던 사법 자치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인디언 이주지원법(Indian Relocation Act, 56년)으로 도시 이주 희망자에게 자립 정착 지원금을 주는 대신 보호구역 지원을 삭감하는 노선으로 선회했다. 73년 지원법이 폐지될 때까지 100여 개 부족이 와해됐다. 도시로 이주한 선주민들은 금세 실업자ㆍ빈민으로 전락했고 보호구역도 쇠락해갔다. 17세의 뱅크스가 돌아온 보호구역의 형편이 그러했다.
그는 미 공군에 입대했다. 일본으로 파병 가 일본 여성과 결혼해 딸을 낳았고, 탈영했다가 혼자 본국으로 송환 당했다. 직후 일본인 아내도 재혼을 했지만, 그 역시 평생 아내와 딸을 찾지 않았다. 그는 9차례 결혼해 스무 명의 자녀를 낳았다. 불명예 전역 후의 그는 부랑자이고 범죄자였다. 65년 그는 한 식료품점을 털다가 체포돼 2년 7개월 18일간 옥살이를 했는데, 함께 범행한 백인은 보호관찰(probation) 처분을 받고 풀려난 사실을 알고 현실을 깨달았다고, 84년 ‘피플’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옥에서 만난 같은 부족(Ojibwa) 친구(Clyde Bellecourt)와 인디언 권익운동을 하다 러셀 민스 등과 의기투합, 68년 11월 미니에폴리스에서 AIM을 결성했다.(NYT) 그가 의장을 맡은 조직은 알카트래즈 점거 등 일련의 ‘사건’을 거들거나 주도하며, 불과 2년 만에 조직원 2만5,000명의 거대 단체가 됐다.
압권은 72년 AIM이 주도한 ‘파기된 조약의 길 Trail of Broken Treaties’ 캠페인과 워싱턴D.C 인디언 사무국 점거였다. 트레일러에 이동주택을 매달고 10월 미국 서부해안을 출발한 AIM 회원 500여 명은 근 한 달 간 대륙을 횡단하며 정부가 저버린 인디언과의 약속(조약)과 자신들의 현실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그리고 대선 직전인 11월 수도 워싱턴D.C에 도착, 자치권 보장 등 20개항 요구안을 내걸고 미국 정부에 협상을 요구했다. 재선을 앞둔 닉슨 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들은 인디언사무국이 있던 내무부 빌딩을 점거, 닷새간 농성하며 인디언 관련 기록과 문서를 태우고 로비와 복도에 불을 질렀다. 직접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었고, 그들은 큰 처벌 없이 풀려났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초기였고, 미 정부나 FBI에게 인디언들의 분란은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문제였다.
73년 운디드니 점거사태는 사정이 달랐다. 뱅크스와 민스는 사태 주동 혐의로 기소돼 연방 법정에서 정부와 싸웠다. 아메리칸 인디언 뉴스통신사(AIPA) 기자였던 로라 위트스토크(Laura Wittstock)는 “당시 AIM의 풀뿌리 조직사업은 워싱턴 언론사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는데, 의장이자 대변인이던 뱅크스의 역할이 돋보였다.(…) 나는 그의 지성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startribune.com)
법원은 변호인단이 공개한 검찰의 증거조작과 불법 도청 등을 근거로 이듬해 소를 기각했다. 하지만 뱅크스는 운디드니 점거 일주일 여 전, 사우스다코다 주 커스터 카운티 법원 청사에서 다른 판결에 항의하며 경찰관을 폭행하고 경찰차와 법원, 상공회의소 방화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인디언을 고의 살해한 백인 청년에 대해 법원이 1급이 아닌 2급(과실치사)살인 혐의를 적용한 데 대한 분노였고, 피해자 어머니가 폭행당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훗날 그는 ‘크레이지 호스의 영혼으로 In the Spirit of Crazy Horse’의 저자 피터 매티슨(Peter Mattiesse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학대를 견딜 수 없는 시대적 한계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더는 수모를 겪을 수 없었고, 청년들이 죽어가는 걸 더는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장 15년 형을 받게 된 뱅크스는 캘리포니아로 도주했다. 시민 140만 명이 그를 선처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Jerry Brown)은 그에게 피신처를 마련해주고, 76년 사우스다코다 주의 범죄인 인도요청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83년 주지사가 바뀔 때까지 캘리포니아에 머물며 대학 강연 등을 했고, 데이비스 시의 인디언 2년제 대학 데카나위다-퀘찰코와틀(Deganawidah Quetzalcoatl) 칼리지 학장을 맡기도 했다.
78년 미 의회가 인디언아동복지법 등 새로운 악법 제정에 나서자 뱅크스가 시작한 일이‘기나긴 행진 the Longest Walk’이었다. 인디언 단결과 악법 저지를 기치로 모인 2,000여 명의 AIM 회원들은 2월 12일 인디언 권리찾기 운동의 성지인 앨카트래즈 섬에서 출정식을 갖고 5,100km 대륙을 횡단해 7월 15일 수도에 입성했다. 워싱턴D.C 집회에는 인디언 탄압에 항의하며 73년 영화 ‘대부’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했던 배우 말론 브란도와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 등이 참석했다. 법안은 모두 부결됐고, 대신 환각성분이 포함된 페요테 선인장 흡입 의식으로 금지됐던 인디언 종교의식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인디언 종교 자유법’이 제정됐다.
주지사가 바뀐 뒤 뉴욕 오논다가(Onondaga) 인디언보호구역으로 옮겨 약 1년여 간 더 피신했던 뱅크스는 84년 사우스다코다로 자진 출두, 18개월 옥살이를 했다. 50대 이후의 그는 리치레이크 보호구역으로 돌아가 선주민 마약 및 알코올중독 근절과 가정폭력 추방 등 생활 개선 운동을 이어갔다. 낚시 허용시즌을 하루 앞두고 의도적으로 낚시를 감행, 강과 호수가 백인의 법이 간섭할 수 없는 인디언의 것임을 과시하며 말썽을 빚기도 했지만, 그는 대체로 유순해졌다. 인디언 전통 방식으로 곡물과 시럽 등을 재배ㆍ수확해 판매하며 주민 자립을 돕기도 했는데, 규모가 꽤 컸던지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 많은 친구를 둔 데다 활달하고 준수한 외모를 지닌 그는 미드와 함께 ‘모히칸족의 최후’ 등 여러 편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양쪽에서 욕을 먹곤 했다. 부족 기득권층은 말썽을 피워대는 그를 언짢아했다. 중년 이후의 순치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조직원들이 옥살이를 할 때 혼자 도망쳐 백인들에게 얹혀 호의호식하다가 투항한 것도 전사로는 자격 미달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그의 생애와 AIM의 지향은 말썽(trouble)과 자치, 회복(recovery)의 세 단어로 집약될 것이다. 최대한 말썽을 피워 여론을 환기하고, 선주민 자치를 통해 인디언 번영과 전통을 회복하는 일. 그와 AIM을 말썽의 진앙지인 양 비난하는 데 대해 만년의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30년간 AIM을 이끌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말썽을 부린 게 아니라 말썽이 있는 곳에 찾아갔다.(…) 우리는 건축가도 의사도 아니고 다만 늙은 병사(dog soldiers)에 불과했지만, 우리가 한 일은 변화를 이끄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건축가도 되고 기술자도 되고, 변호사나 장거리 육상선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aimovement.org)
AIM은 60, 70년대 시민권운동의 기운 속에서 탄생했지만, 지향은 자유와 인권이 아니라 자치와 전통 회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던 시대에 가장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했다. 이래로 북미 인디언의 법적 지위와 권리는 크게 나아졌지만, 그들의 처지는 대체로 비참하고 편차도 무척 크다. 인디언 약 70%가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 살며, 보호구역 내 가정폭력 성폭력도 미국 평균보다 3배 이상 높다고 알려져 있다. 201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는 순수 인디언이 290만 명, 혼혈이 230만 명으로 전체 인구(3억 870만명)의 1.6%이며, 약 70%가 도시에 거주한다. AIM과 인디언 공동체사회의 미래는 썩 밝지 않다.
데니스 뱅크스가 78년 시작한 ‘기나긴 행진’은 2008년 부활해 네 차례(총 5회) 이어졌다. 매회 캐치프레이즈는 환경과 지구온난화, 인디언 당뇨퇴치 같은 보건 이슈 등으로 바뀌곤 했다. 2016년 5회 대회의 선도자는 79세의 뱅크스였다. 국립아메리카인디언박물관 인터뷰에서 그는 “선댄스의 영적 의식과 전통, 걷기와 달리기 같은 건강하고 깨끗한 삶의 회복을 통해 우리는 마약이나 자살 문제, 가정폭력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내 생애에 그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당장 누군가는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뱅크스는 심장수술에 이은 폐렴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가족 친지들이 부른 임로가(臨路歌)는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로 시작해 “우리는 잘 살 것이다”로 끝나는 ‘AIM 단결가’였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