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이자 글쓰기 교육자였던 이오덕 선생과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무려 30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은 서간집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양철북, 2015)를 읽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침대에 누워 책 표지를 막 펼친 순간, 동거녀가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이 니 영혼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나는 무안해져서 바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엘리 위젤의 희곡 ‘샴고로드의 재판’(포이에마, 2014)을 모처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동거녀에게 시험 강의를 해본답시고 식탁 앞에 앉혀 놓고, 작품 서두에 나오는 등장인물부터 소개했다. “나그네. 냉소적이며 극도로 정중하다. 사악하다……” 샘을 소개하는 도중에 동거녀가 “너네!”라고 내 말을 잘랐다.
대학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어느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의 글은 훌륭한데, 그 글을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건 왜 그렇죠?” 미리 준비나 한 듯 대답이 술술 흘러 나왔다. “글쓰기에는 반성하고 점검하는 기능이 있어. 또 글쓰기에는 항상 어떤 이상(理想)을 찾아내고, 이상을 찾아가려는 본능이 있어. 그래서 원래의 인격은 형편없는데도, 글에서만은 자신의 원래 인격보다 훌륭하게 되는 거야.” 그 학생은 자못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조갑제ㆍ정규재ㆍ변희재ㆍ지만원 같은 지식인과 문필가들을 보면 글쓰기 자체가 ‘반성’과 ‘이상’을 동반하게 마련이라는 나의 믿음을 분쇄한다.
어느 날 헌 책방에서 김주연의 ‘사악한 지식인’(문이당,1997)이라는 산문집을 발견했다. 김주연은 책 제목과 같은 에세이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을 교만하고 천박한 데다가 너무 정치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탓에 한국 지식인들은 형이상학적ㆍ종교적 구원이라는 주제에는 태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한국 지식인의 특색일 수는 있지만, 지식인은 왜 원천적으로 사악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해 주지 못했다.
이병주가 1965년에 발표한 ‘소설ㆍ알렉산드리아’(바이북스,2009)에는 5ㆍ16 쿠데타를 비판한 사설로 2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작가의 체험이 녹아있다. “감옥살이에서 체험한 일이지만, 지식인의 경우 꼭 죽어야 할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호락호락하게 잘 죽지 않는다. 무식자의 경우는, 육체적으론 지식인보다 훨씬 건장해도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려 나뭇가지가 꺾이듯 허무하게 쓰러져 버린다. 지식인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두 개의 자기로 분화된다. 하나는 그 난관에 부딪혀 고통을 느끼는 자기, 또 하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기를 지켜보고, 그러한 자기를 스스로 위무하고 격려하는 자기로 분화된다. 한편 무식한 사람에겐 고난을 당하는 자기만 있을 뿐이지 그러한 자기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는 자기가 없는 것이다.” 이병주는 고작 두 개라고 했지만 지식인은 실로 무한개의 자아를 가졌다. 이것이 그들을 사악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내가 하고픈 말은 따로 있다.
정권 교체 이후, 많은 칼럼니스트들이 칼럼의 소재가 없다고 난리다. “박근혜 정권 때는 소재가 많았다. 정권이 바뀐 다음부터는 쓸 게 없어서 힘들다.”(이정모) “예전에는 격주로 써도 쓸 거리가 넘쳤는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인데도 하루 전까지 안갯속이다. 박근혜 대통령 때가 칼럼니스트로는 봄날이었다.”(서민) 지난 정권에서는 그저 ‘박근혜는 악’이라고 몰아 붙이기만 해도 그럴싸한 칼럼이 되었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는 선악의 이분법적 시각만으로는 칼럼 소재를 찾기도 어렵고, 칼럼의 쓸모를 찾기도 힘들다.
문재인 정권이라고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중도 보수를 기저로 한 현 정권의 ‘안전 운행’과 ‘내로남불’식 정의를 파고들려면 새로운 무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은 모범적인 ‘지식인’ 또는 ‘어용 지식인’보다 ‘사악한 지식인’이 돼야 한다. 글을 사악하게 쓰면 쓸수록 필자의 인격과 그가 쓴 글 사이의 간격과 모순조차 없어진다. 한 해 동안 이 지면에 내가 쓴 칼럼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행여 내 인격이 고매하다고 착각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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