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가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ㆍ최수근 옮김
이김 발행ㆍ624쪽ㆍ2만5,000원
한때 중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모 패딩 브랜드가 ‘등골 브레이커’란 이름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비싼 가격 때문에 ‘부모의 등골을 뽑아 먹는다’는 의미의 등골 브레이커는, 사회적 질타에도 불구하고 브랜드만 바뀐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굳게 박힌 용사의 검처럼 등골 브레이커를 뽑아낼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엄마? 아빠? 선생님? 미국의 심리학 연구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에 따르면 친구다. 친구가 입지 않으면 나도 입지 않는다.
해리스의 저서 ‘양육 가설’은 부모가 아이의 인격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1998년에 미국에서 출간돼 2008년 개정판이 나왔으니 20년 전 책인 셈이다. 초판 출간 당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쓴 세계적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심리학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해리스의 주장은 학계에서 첨예한 논의를 야기했지만 전환점이 되지는 않았다. 책이 국내에 번역되기까지 20년이나 걸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의 발달에 있어 유전적 요인을 제외한다면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이 아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해리스는 이를 ‘양육가설’이라고 부른다. 주장의 내용과 더불어 저자의 당돌한 태도와 도전적인 표현은 책 읽는 흥미를 더한다.
“누구도 여기(양육가설)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결정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성과 양육환경, 이 두 가지의 조합이다. 당신도 심리학 교수들도 이렇게 믿고 있다.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생각이 이토록 절묘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하다고 보기 어렵다.”
저자는 양육가설을 반박하는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인정한다. 엄마의 하이힐을 훔쳐 신는 소녀, 학대 받는 소년이 보이는 폭력성, 뚱뚱한 부모 아래 뚱뚱한 아이. 한 인간의 어린 시절을 다루는 영화에서 어떻게 부모가 “주연”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는 영화의 장르를 스릴러로 바꿨을 때 부모가 주범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양육가설이 만들어낸 ‘참사’의 근본적 책임을 프로이트에게 돌린다. “양육가설의 진정한 창조주를 꼽자면 역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성인이 지닌 심리적 병리현상의 원인을 그의 어린 시절에서 찾게 하고 그들의 부모에게 책임을 지우는 이 잘 짜인 허구적 시나리오를 창조한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인 것이다.”
저자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사회적 관계와 규범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초기학습의 주인공이 부모라는 것, 그리고 그 학습의 결과가 아이의 남은 삶에 지속적인 본보기가 될 거란 의견엔 반대한다. 인간의 기질 중 많은 부분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며, 그것이 성격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핵심적 영향을 끼치는 인물은 부모가 아닌 아이가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 정확히는 또래 친구들이라는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모를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방을 하는 경우에도 그 기준은 “부모가 정상적이고 전형적으로, 즉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고 여겨질 때”뿐이다. 실제로 많은 부모가 어린 자녀의 일찌감치 전형화된 생각에 놀란다. 저자 역시 다섯 살 딸로부터 “아빠는 요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물었다. “그럼 엄마는 망치질이나 톱질 같은 걸 하면 안 되겠네?” “그렇죠” 딸은 이렇게 답하면서 나에게 참 난처하게 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해리스의 주장은 부모, 자녀, 기성 학계,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부모는 자신이 자녀의 인생에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자녀는 자신의 성격이 이 모양인 것에 대해 부모 탓을 할 수 없어서, 학계는 거의 합의에 가까운 이론을 깨뜨리려는 ‘학위 없는’ 연구자 때문에 불편하다.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으로 석사를 받은 해리스는 독창성과 독립성이 하버드의 기준에 미달됐다는 이유로 박사과정을 밟지 못했다. 이 책은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까지 올랐으나 많은 이들이 그의 학위를 문제 삼으며 “부모에게 자식을 학대하거나 방치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해리스는 이를 부인하며 2008년 개정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의 한 가지 바람은 나로 인해 육아가 더 쉬워지고 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들은 아직도 그들의 문화가 규정한, 불안감도 노동강도도 극심한 육아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부모들은 기운을 불어 넣으려는 나의 선의의 조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작 내 딸들도 자기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다. 잠깐, 왜 나는 내 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거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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