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신 ‘레베’ 전시회
소속사와 분쟁 등 시련 끝 찾은 꿈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4개의 방에
가수는 청각으로 각인된다.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와 선율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가수라고 청각으로만 호소하지 않는다. 때로는 글과 그림과 영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청각을 넘어 시각으로 가수의 내면과 과거를 담아낸 두 전시회를 소개한다.
‘야생화’처럼 다시 꿈을 꾼 박효신
짧은 머리의 사내가 왼쪽 머리를 베개에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운 모습이 평온하기보단 애처롭다. 지난 8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아트홀. 전시장 외벽에 걸린 이 석고상 앞에 관객들이 모여 눈을 떼지 못했다.
석고상의 주인은 가수 박효신이다. 그는 작업실 테이블 위에 얇은 천을 두른 뒤 누워 직접 모델이 됐다. 미술작가들은 그의 몸에 석고를 부었다. 헤어드라이어기로 10여 시간을 말려 가며 본을 떴다. 박효신이 몸으로 낳은 분신인 셈이다. 산고 끝에 나온 작품이 진열된 유리엔 ‘Rever(레베)’란 단어가 적혀 있다. 프랑스어로 꿈을 꾸다라는 뜻이다. 작품의 제목이자, 전시(25일까지)의 주제이기도 하다. 박효신은 전시장 곳곳에 스프레이 등을 활용해 꿈(Rever)을 칠했다.
전시장은 박효신이 꿈으로 채운 공간이다. 그의 앨범과 연관이 깊다. 박효신은 지난해 낸 7집 ‘아이 엠 어 드리머’에서 꿈을 꾸고 또 꾼다. 앨범엔 ‘꿈’, ‘홈’ 등 꿈과 관련된 곡이 4개나 실렸다. 1999년 1집 ‘해줄 수 없는 일’로 데뷔해 데뷔 18년째에 접어든 그는 왜 꿈에 천착하는 것일까.
박효신은 한동안 꿈을 잃고 살았다. 전 소속사와 벌인 법적 분쟁 등 시련을 겪으며 좋아하던 음악까지 싫어졌다. 박효신은 2014년에 낸 노래 ‘야생화’처럼 위기를 딛고 일어섰지만, 음악에 대한 책임감은 그를 더욱 짓눌렀다. 박효신은 지난달 극장에서도 개봉한 음악 영화 ‘뷰티풀 투모로우’에서 “음악은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그림자였다”라고 고백했다. 7집을 준비하는데 가사도 멜로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박효신은 쿠바로 떠났다. 낯선 곳에 간 그는 여유를 찾았다. 박효신은 아바나에서 거리 공연까지 했다. 생애 첫 도전이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짧은 여행에서 얻은 용기였다. 박효신은 쿠바를 다녀온 뒤 꿈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그는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늘 품고 있는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꿈을 목표가 아닌, 늘 주위에 두며 삶을 행복하게 하는 씨앗으로 보며 삶과 창작에 활력을 얻겠다는 믿음이었다.
박효신은 이렇게 찾은 꿈에 대한 화두를 4개의 방에서 보여준다. 잠자리에 들기 시작해 꿈에서 깬 뒤 현실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꿈의 조각들’에선 만화경 같은 공간에서 꿈을 꾸는 박효신이 전시되고, ‘꿈의 심연’에선 흙더미에 싸인 그의 다양한 얼굴 표정을 뜬 석고본이 묻혀 있다. 방마다 빛과 향도 다르다. 현실에 다가올 수록 전시실의 빛은 밝아지며 향은 가벼워진다.
마지막 전시 공간에 이르면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발이 석고물로 설치돼 있다. 꿈에서 깨 현실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는 앞으로 어떤 꿈을 음악으로 펼칠까. 박효신은 창작 집단 ‘더 디자인 밀라 아리완’과 전시를 기획했다. 박효신의 음악과 그가 꾸는 꿈을 시ㆍ청ㆍ후각으로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전시다.
#유재하 30주기 전시회
모교 한양대에서 마련한 추모 공간
음악 열정 불태운 혜화동 방 재현
김수철과 만난 ‘재하의 방’
“메이 쉬 윌 스테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한 양옥 주택. 2층에 있는 방에서 청년이 1960년대를 풍미한 미국 유명 팝 듀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히트곡 ‘에이프릴 컴 쉬 윌’을 부른다. 통기타의 줄을 한음한음 짚어가며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앳되면서도 구슬프다. 가수 유재하(1962~1987)가 그의 방에서 형에게 불러준 노래다.
유재하의 방엔 밤낮으로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랍장엔 LP가 촘촘히 꽂혔다. 전설적인 영국 록밴드 레드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부터 미국 유명 가수 베리 매닐로우의 라이브 앨범까지 다양하다. 영어로 그의 이름을 뜻하는 ‘JAEHA’가 새겨진 베이스기타도 놓여 있다. 여기서 소년 유재하는 인기 록밴드였던 작은거인의 김수철도 만났다. 지인의 소개로 김수철이 유재하의 방에 찾아 왔고, 둘은 서로 기타 얘기를 나눴다. 지난달 10일부터 열린 ‘유재하 30주기 전시’(2018년 6월 30일까지)에 마련된 ‘재하의 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 곳은 유재하의 모교인 한양대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박물관에 꾸린 공간이었다. ‘재하의 방’에선 유재하가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한 1분 25초 분량의 ‘에이프릴 컴 쉬 윌’이 처음 공개됐다.
전시회 대부분은 지인들이 기억하는 유재하로 채워졌다. 쓸쓸한 음악처럼 염세와 유약으로 점철된 유재하의 이미지는 신화다. ‘집’시리즈로 유명한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인 서도호는 유재하를 “어릴 적부터 연예인 끼가 있었다”고 했다. 중국 배우 리샤오룽(李小龍ㆍ1940~1973)처럼 옷 입고 쌍절곤도 잘 돌려 있기가 많았다는 게 유재하의 초등학교 동창인 서도호의 추억이다.
유재하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록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에 따르면 유재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기타 치며 노래했다. 친구들이 딱지치기를 할 때 유재하는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노래를 불렀다.
유재하의 대학 동기들은 그와 함께한 작곡 수업을 잊지 못한다.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베껴오면 어떡하는가!” 유재하가 작곡 수업 과제로 낸 악보를 본 교수는 그의 악보를 집어 던지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때 만든 곡이 현악 4중주 ‘미뉴에트’ 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에 실린 그 노래다. 데뷔 때도 역경이 많았다. 전시장에 놓인 ‘유재하 스토리북’에서 MBC의 한 PD는 유재하가 가창력 부족으로 방송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사연으로 그와의 만남을 복기한다.
전시장의 한 벽면에 마련된 ‘재하에게 쓰는 편지’ 코너엔 ‘당신의 소리가 듣고 싶어 81학번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란 한 관객의 메모가 걸려 있다. 1987년 11월 1일 아침,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 뒤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들을 향한 부모의 그리움도 ‘재하의 방’에 머물렀다.
‘저녁 녘 재야(재하) 방엔 적막이 잠겨 든다. 재야 앉던 책상에는 한 폭의 오선지, 오선지 우에는 눈물만 고인다’(유재하의 아버지가 쓴 시 ‘오선지’ 중)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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