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영역이 마침내 스포츠 심판으로까지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체조연맹(FIG)은 일본 정보기술(IT) 기업 후지쓰와 손잡고 2020 도쿄 하계올림픽에서 AI 로봇이 선수의 연기를 심판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한충식 대한체조협회 전무이사는 18일 본보와 통화에서 “도쿄 올림픽 전까지 국제 대회를 통해 시스템을 점검하고, 도쿄 올림픽에서 AI가 연기에 대한 모든 채점을 하는 것이 FIG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지난달 5일 “연기를 마친 선수는 로봇 심판에게 인사하고, 점수는 스크린에 바로 뜬다”며 “이 장면은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아닌 실제 체조에서 볼 수 있는 판정 시스템”이라고 전했다.
스포츠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은 현재 추세다. 야구나 축구 등 구기 종목은 비디오 판독을 도입했고, 테니스의 호크 아이는 심판의 판정 후 영상과 그래픽으로 오심을 바로 잡는다. 그러나 이들 기계는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을 했지만 체조에서는 AI가 인간을 제치고 심판으로서 전면에 등장한다. 선수의 연기를 사람(심판)이 점수로 평가하는 대표 종목이라서 더 눈길이 간다.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 이정식 감독은 “예술성을 평가하는 체조에 AI를 도입한다고 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실제 그렇게 한다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갑갑하다”고 말했다.
일본체조협회 전무 출신으로 제9대 FIG 회장으로 뽑혀 올해 1월 임기를 시작한 와타나베 모리나리 회장은 체조 채점 때 심판을 돕는 AI 지원시스템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종목마다 10대 이상의 동작측정 카메라를 동원해 체조 선수들의 연기를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담는 초정밀ㆍ고선명 레이저 센서를 탑재한 로봇을 개발 중이다. FIG는 지난 10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전 세계 관계자들에게 시스템을 시연하기도 했다. 브루노 그란디 FIG 전 회장은 “심판이 하루 8시간을 일해야 하는데, 집중력 문제도 있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일관되게 채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AI 심판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조계 현장 반응은 반신반의다. 심판의 채점에 대해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AI 심판 도입은 공정성을 확보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예술성을 평가하는 종목의 미세한 표현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정식 감독은 “공정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만 선수들에게 AI가 좋아할 만한 정형화된 기술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창의성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역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았던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전혀 못 보거나 AI 알고리즘에 등록되지 않은 동작을 했을 때 어떻게 점수를 줄 것이냐”며 의구심을 품었다. 해커 공격을 받아 점수를 조작할 수 있는 사이버 보안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AI 채점 시스템이 기계체조에서 정착하면 사람이 연기를 채점하는 리듬체조 등 다른 종목으로도 확산될 수 있을까. 한충식 전무는 “다른 종목에서의 적용은 힘들 것”이라며 “리듬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종목들은 기계체조보다 표현력을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AI 로봇에게 심판을 맡기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지섭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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